애프터 코로나, 위기를 헤쳐 가는 동아시아 철학의 지혜

김정탁 중앙일보 기자로 재직중 미주리대학교에 유학하여 언론학 박사를 받았 다. 성균관대학교에서 34년간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언론학회장을 역 임했다. 현재 성균관대 명예교수 저서로『禮와 藝: 한국인의 의사소통 사상을 찾아서』(2004년) 『노장·공맹 그리고 맥루한까지』(2004년), 『玄: 老莊의 커뮤니케이션』 (2010년), 『장자 내편·외편·잡편 역주해소』(2019년) 가 있다.

페스트균이 숙주인 인간과 공존하는 전략 선택

역사는 필연보다는 우연이다

흑사병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던 병이다. 1347년부터 1351년까지 불과 4년 사이에 2천만 명 가까운 사람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2 천만 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유럽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무서운 흑사병이 어떻게 사라졌을까? 지금 한국처럼 방역이 잘 되어서였을까? 아 니다. 페스트균이 갑자기 활동을 중단해서이다. 마치 모든 페스트균이 그러기로 합의한 것처럼. 이것은 인류의학사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학자들은 페스트균이 숙주인 인간을 살려서 오히려 공존하는 방안을 택한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런데 흑사병이 인류에게 부정적으로만 작용한 건 아니다. 긍정적인 작용도 있었다. 르네상스라는 문예부흥이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열렸기 때문이다. 흑사병으로 인해 중세를 지배했던 교회의 권위는 여지없이 추락했다. 흑사병이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만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었다. 흑사병을 잠재울 수 있는 건 과학이지 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는 흑사병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자 죽은 사람의 유산이 증가해 각 가정마다 부가 늘어났다. 늘어난 부는 개인의 가처분소득 증가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문예(文藝)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키게 된 것이다.

한편 가처분소득의 증가는 여성에게는 사치품의 소비로 나타났다. 요즘 말로 명품 구입이 늘어난 셈이다. 이런 명품 구입은 여성 속옷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여성은 일종의 삼베를 원료로 하는 속옷을 입었는데 재질이 거칠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이런 거친 속옷을 벗어버리고, 중국에서 수입된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속옷으로 치장했다. 그러자 버려진 여성 속옷이 쓰레기장마다 넘쳐났다. 넝마주이들은 폐품 활용을 위해 여성 속옷을 종이 원료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종이의 주원료는 펄프이지만 펄프로만 종이를 만들면 원가가 상승한다. 그래서 삼베 같은 것을 펄프에 첨가하면 종이 원가가 낮아진다. 이렇게 낮아진 종이원가로 인해 출판이 활발해졌다. 당시 구텐베르크에 의해 인쇄기가 발명되었지만 종이 값이 비싸서 함부로 인쇄 할 수 없었다.

당시 출판업이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분야는 성경이다. 출판이 본격화되기 전에는 성경이 양피지 위에 손으로 직접 쓰여서 만들어졌기에 성경 책 값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비쌌다. 그러니 성경은 고위성직자만이 지닐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당시 면죄부 판매가 가능했던 건 성경이 그만큼 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직자가 성경에 면죄부 판매가 허용된다고 말하더라도 일반인은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종이값 인하로 성경이 대량으로 인쇄되면서 면죄부 판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나아가 인쇄술을 통한 성경의 대량보급은 종교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여성의 사치가 종교혁명을 탄생시킨 셈이다.

인류가 앞서 경험했던 흑사병 사태에서 볼 때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어떤 방향으로 갈지, 또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지닐지 지금으로선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서양 역사철학을 대표하는 헤겔은 역사란 이성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자신의 꿈을 완성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흑사병 사태가 문예 부흥과 종교혁명으로 예기치 않게 전개되는 사태에서 보듯이 역사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으로 생겨나는 게 많다. 특히 거대한 변화일수록 그 예측이 더욱 힘들다. 그러니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반드시 부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근대를 굳게 지배해 왔던 이성의 위력이 그 힘을 잃어가는 건 분명하다. 그만큼 불확실성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수퍼 컴퓨터로 예측 못해

근대 이성기획의 한계

오늘날 우리가 사는 근대사회는 이성에 입각해 있다. 그래서 합리성(合理性), 즉 이성에 합당한 것만이 가치를 존중받는다. 이런 사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로 잘 설명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생각한다’는 말이다. ‘생각한다’는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데카르트의 말대로 ‘생각한다’가 곧 ‘존재한다’를 의미할 때 모든 건 이성 중심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왕정을 대체한 법치국가, 봉건주의를 대신한 자본주의 내지 사회주의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근대철학의 문을 연 철학자로 데카르트가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성 말고 감성이 있지 않은가? 감성이 중심이 되면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 한다’라는 말로 바뀌게 된다. 그렇지만 근대에선 감성이 철저히 소외되어 이 성의 변방에 머물고 말았다. 그 결과 합리성이 통정성(通情性)을 무력화시키 면서 근대를 대표하는 정신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서 볼 때 근대의 기획을 주도했던 이성의 한계가 노출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이성을 통해 모든 상황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게다가 컴퓨터 등장은 이런 통제를 효과적으로 정착시키는데 기여한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서 우리는 수퍼 컴퓨터로도 예측되지 못하고, 통제되지 못하는 분야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면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조차 주식투자에서 60조원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기록했다. 주식투자야말로 수학과 통계라는 철저히 이성에 기반한 기제로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이런 엄청난 손실을 기록했다는 점은 이성적 판단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일이다.

근대이성의 기획은 우리의 건강과 관련해서도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바람직한 위생(衛生)이란 무엇일까? 근대의 기준으로는 깨끗한 생활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유행하는 아토피(atopy)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 않다. 과거에는 아토피라는 질병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어린애들에게 많이 발생한다. 왜 그럴까? 농담 삼아 아토피를 한자로 풀어보면 ‘아이 아(兒)’, ‘흙 토(土)’, ‘피할 피(避)’이다. 즉 아토피란 아이가 흙을 피해서 생겨난 병이다. 운동장 흙바닥에서 뛰놀던 시절에는 아토피 환자가 적었다. 지금은 흙을 거의 밟지 않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화학물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그 중에서도 위생이 지나치게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는 어린애들이 아토피에 특히 많이 걸린다. 그러니 아토피는 편한 환경이 만들어준 선물 아닌 선물이다.

이를 위생가설이라고 말한다. 이 가설로서 요즘 어린애들에게 아토피 질병 이 왜 증가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위생가설은 과도하게 깨끗한 환경이 어린애들에게 면역계를 자극할 만한 자극원을 없애주었기에 질병이 오히려 발생한다고 본다. 즉 감염 자극에 노출되지 않아서 면역계에서 감염반응과 알레르기 반응의 불균형이 생겨 발병한다는 것이다. 이런 위생가설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 일례로 의대에서 동물실험을 할 때 무균돼지, 즉 외부의 균을 전혀 접하지 않은 돼지를 키운다. 이 돼지는 무균실에선 살 수 있지만 우리가 숨 쉬는 일반 대기에선 금방 죽는다. 왜냐하면 균에 대한 면역력, 외부 환경의 적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형성되지 않아서이다. 그러니 돼지조차 적당히 더러운 곳에서 살아야 면역력도 강해진다.

비근한 예로 옛날에는 소아마비에 걸려서 지체부자유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소아마비는 신경계가 폴리오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런데 소아마비 환자들이 자라난 환경을 살펴보면 환경이 좋은 사람들에게 많다. 성장환경이 열악한 어린애는 폴리오바이러스에 감염되어도 감기처럼 앓고 지나간다. 하지만 지나치게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난 어린애들은 면역력이 약해져 이런 바이러스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근대 이성의 기획은 지구환경과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잘못된 신념을 심어 준다. 그것은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신념이다. 지구에는 온갖 생명체가 공존한다. 인간은 그 중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운운하면서 다른 생명체를 지배하려고 든다. 그런 탓인지 환경보호 캠페인도 철저히 인간중심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인간중심적 환경캠페인이 잘 드러난 예가 한 때 우리 사회에서도 유행했던 깨끗한 물 보존 캠페인이다.

이 캠페인은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이 몸의 70%를 차지하므로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앞세운다. 실제로 일주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물을 필요로 하고, 특히 대사활동의 결과로 생기는 노폐물의 배설을 위해선 물이 필수적이어서다. 예를 들어 우리 혈액에 쌓인 노폐물은 신장에서 걸러진다. 그리고 신장에서 걸러진 노폐물은 오줌이라는 형태의 물을 통해 배설된다. 그래서 오줌을 통해 물이 배설되는 만큼 우리 몸에 물을 다시 보충해야 한다. 이 때문에 깨끗한 물을 유지하는 건 건강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깨끗하다는 건 인간의 기준으로 깨끗한 것이므로 다른 생명체에는 깨끗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인간에게 깨끗한 물이 다른 생명체에 꼭 건강한 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無로 오묘함을, 有로 명료함을 보다

『도덕경』 1장의 교훈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적합해도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이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때문에 무로써 천지의 오묘함을, 유로써 만물의 명료함을 본다.

무와 유는 이름만 달리할 뿐 같은 데서 나와 이런 같음을 두고 현하다고 말 한다.

현하고 또 현하니 많은 오묘한 것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도덕경』 1장)

첫 문장인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적합해도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의 원문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다. 이 내용은 워낙 유명해서 여러 곳에서 자주 만난다. 그리고 1장의 나머지 내용은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 어째서 가능한지를 설명하는데 할애한다. 노자는 무(無)와 유(有)의 관계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노자에 따르면 “무는 천지의 시작이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무로써 천지의 오묘함(妙)을, 유로써 만물의 명료함(徼)을 본다.”라고 말한다. 어째서 무는 천지의 시작이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일까? 이를 위해 동아시아의 전통적 우주관 내지 자연관, 또는 생명관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인은 오래 전부터 천지, 즉 우주자연은 혼돈(混沌)에서 시작된다고 믿어 왔다. 서양에선 혼돈을 카오스(chaos) 쯤으로 해석하는데 혼돈은 카오스와 의미상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카오스의 반대 개념은 질서를 뜻하는 코스모스(cosmos)여서 카오스에선 질서와 반대되는 혼란의 의미가 강하다. 때문에 혼돈은 혼란을 뜻하는 카오스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혼돈은 모든 생명체들이 가능태로 혼재되어 있는 그야말로 생명의 보고이다. 생명의 보고이기에 엄청난 에너지를 함유한다. 물론 생명체가 가능태로서 머물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여기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래서 혼돈은 이름 없는 무명(無名)의 상태이다. 이 때문에 노자는 무(無)를 통해 천지의 오묘함을 본다고 말한다. 이것이 천지가 시작할 때의 모습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연의 결이 깨진 데서 시작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생명체의 가능태들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결과 생명체는 포유류와 포유류 아닌 것으로 구분되고, 시간이 더 흐르면서 포유류는 땅에 사는 포유류와 물에 사는 포유류로 구분되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땅에 사는 포유류는 인간이란 포유류와 인간 아닌 포유류로 보다 구체적으로 구분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행된 생명체의 분화로 말미암아 새로운 종류의 생명체가 지구상에 속속 등장하게 마련이다. 또 등장할 때마다 새로운 생명체에 이름이 제각각 붙여지는데 이것이 혼돈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에 노자는 유명(有名), 즉 이름 있음을 통해 만물의 명료함(徼)을 본다고 말한다. 명료함은 혼돈과 반대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 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노자는 “무와 유는 이름만 달리할 뿐 같은 데서 나와 이런 같음을 두고 현(玄)하다고 말한다.”라고 한다. 즉 무와 유가 이름이 다르더라도 실제로는 같은데서 나왔기에 이런 같음을 두고 딱히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 현이라고 규정한다는 뜻이다. 이어서 “현하고 또 현하니 여러 오묘한 것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하면서 또다시 현을 언급한다.

현은 황(黃)과 반대 개념이다. 『천자문』의 첫 문장인 ‘천지현황(天地玄黃), 즉 하늘은 현하고 땅은 황하다’가 이를 잘 말해준다. 황은 대상을 구분하지만 현은 연결을 강조한다. 따라서 노자는 우주자연의 시작(혼돈)에 해당하는 무(無)와 지금의 유(有)는 구분된 게 아니라 연결된 것으로 본다. 이것이 서구 문명관과 결정적 차이이다. 서구의 문명관은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 으로 특징되는데 이런 역사관을 가리켜 진보의 역사관이라고 말한다. 현재를 ‘civilized’ 되었다고 보고, 과거는 ‘less civilized’ 되었고, 미래는 ‘more civilized’ 될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civilization’의 정도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한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과거의 혼돈 상태인 무명과 지금의 질서 상태인 유명이 말만 다를 뿐 모두 현(玄)으로 이어져서 끊임없이 교호한다고 파악한다.

이런 사실은 서구가 우주자연의 역사를 카오스(혼란)에서 코스모스(질서)로 이행하는 것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서구에선 카오스를 부정적으로, 코스모스는 긍정적으로 본다. 구 소련의 우주선도 코스모스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바 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과거는 부정적이고, 현재는 긍정적이라는 입장에서 벗어나 있다. 대신 지금을 원래의 상태였던 혼돈(混沌)과 끊임없이 교호하면서 현재를 파악할 따름이다. 즉 현재의 뿌리가 혼돈에서 비롯 되었기에 그 시작을 소중히 여긴다. 그럼으로써 장자가 강조하는 천예(天倪), 즉 자연의 결을 가능한 유지하려고 한다. 참고로 사시사철, 밤낮, 생명체의 생성과 변화 등이 자연의 결에 따른 구분이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무엇보다 자연의 결이 깨진데서 비롯된다고 본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종의 변종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변종 바이러스란 다른 생명체에서 생겨난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옮겨와 새롭게 형성된 바이러스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다른 생명체의 바이러스가 어째서 우리 몸 안에 침투했을까? 무엇보다도 자연의 결이 파괴된 데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박쥐의 몸 안의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투한 것은 박쥐의 생태계가 인간에 의해 위협 당한 결과이다. 즉 인간과 박쥐를 나누는 자연의 결이 인위적으로 깨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서 이제 우리는 문명은 진보한다는 서구의 역사관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문명의 진보를 통해 인간의 생활이 편리해진 건 분명하지만 편리해진 생활에 대한 대가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그 대가를 치른다고 말할 수 있다. 앞으로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사태가 더욱 큰 규모로, 그리고 보다 자주 생겨날 것이기에 그 대가도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만큼 자연의 결이 곳곳에서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치러야 할 대가를 그나마 최소화 할 수 있는 길은 생명체의 원래 상태였던 혼돈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교호하는 일이다. 이것이 노자가 『도덕경』 1장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 김정탁

지구와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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