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생명이다

김승현 전) 서울특별시 정무보좌관. 현) 서울시교육청 교육복지정책자문위원.

21세기의 물은 과연 축복인가

“물은 생명이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모든 인류 문명은 물과 더불어 성장하고 망했다. 인류 4대 문명인 인더스 문명(인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소아시아), 황하 문명(중국), 이집트 문명 등은 모두 강 주변에서 일어나고 사그러든 것이었다. 사람들은 강에서 난 물로 농사를 지었으며, 식수를 삼았다. 때때로 물은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이기도 했다.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닥치면 수많은 인명이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초창기 인류는 물의 신(水神)을 중요한 숭배 대상으로 삼고 가능한 한 노하지 않게끔 했다. 필요하면 사람을 바쳐서라도 물의 신이 화나지 않도록 애썼다.

동양의 유명한 성군(聖君)들은 모두 물을 잘 다스린 사람들이었다. 요순우(堯舜禹)는 모두 치산치수(治山治水)의 대가들이었다.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짓게 하려면 물로 인한 피해가 없게끔 제방을 잘 쌓고 물길을 잘 내어 가뭄에 대비하며, 제때에 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군중들에게 허락하는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그때를 사람들은 ‘태평성대’(太平聖代)라고 불렀다.

중국의 수(隨)나라를 건국한 양제(煬帝)는 물길을 크게 냄으로써 문명의 변화를 도모했다. 중국의 거대 문명 지역인 황하 일대와 장강 일대를 가로지르는 대운하(大運河)가 그의 업적이다. 그동안 중국은 육로로 물자를 이동시켜야 했기에 교통에 큰 불편함이 있었지만 양제의 대운하 덕분에 7세기경부터 중국에 ‘물의 고속도로’가 생겼다. 이 아이디어는 훗날 14세기 경부터 북유럽에 지어진 90여개의 네덜란드 운하보다 7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렇듯 물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음양오행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사주팔자(四柱八字)에서도 물(壬水, 癸水)은 재물의 흐름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렇다 물은 생명이다. 물은 모든 것을 살아 숨쉬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산업화와 도시화, 물의 저주를 촉발하다

그런데 20세기경부터 세계 곳곳에서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면서, 물은 더 이상 축복의 원천이 아니라 저주의 원인이 되고 있다. 1900년대 당시 미국 시카고는 염병, 즉 장티부스가 많이 퍼진 도시로 유명했다. 산업혁명 시기였던 1885년부터 1886년까지 시카고와 일리노이 주에서만 수인성(水因性) 질환으로 죽은 사람이 9만 명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시카고 시(市)가 이용하는 미시간 호수에 폐수가 마구 흘러들며 수질오염이 가속화된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는 시카고 강의 유로를 변경하기 위해 운하를 파서 도시의 폐수가 식수원까지 오염시키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그러나 미시시피 강으로 같은 폐수가 흘러 또 그 지역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시카고 시는 결국 미시시피 강 연안의 세인트루이스 시 등과 소송전을 벌여야만 했다. 시카고는 더 이상 강물이 아니라 지하수를 취수원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한참 뒤 1980년대가 되어서야 시카고는 다시 미시간 호를 식수원 화(化)했다.

구미광역취수장인 해평취수장

21세기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10년 동안 경상북도 구미시와 대구광역시 주민들 사이에는 큰 반목이 있었다. 식수로 활용하는 취수원을 둘러 싼 갈등 때문이다. 대구광역시는 “수돗물의 70%를 낙동강에서 채수하고 있는데, 구미 공단에서 방류되는 오염수에 극단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라며 구미공단 상류로 취수원을 이전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반면 구미시는 자신들이 이용하는 해평취수장을 염려했다. “대구광역시가 구미로 취수원을 옮기게 되면 해평취수장의 수량이 줄어들어 물이 더러워질 수 있고 제조업 시설에 공급되는 용수의 부족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 이다. 취수원 이전 사태는 2018년 6월 실시된 지방선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구에서는 그동안 취수원 이전에 대해 매우 강한 입장을 피력해 왔던 권영진 시장이 재선했고, 구미에서는 환경운동가들과 관점을 비슷하게 가져 왔던 장세용 시장이 처음 당선됐다. 권 시장과 장 시장은 당선 초기부터 강하게 격돌해 사실상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를 ‘두 도시 간 물 이야기’로 비화시킨 주역이 되었다.

물 치유능력의 부재

도시의 경계를 뛰어넘는 수질오염과 물 분쟁은 정부, 기업, 시민사회 등 대부분의 이해관계자가 물 치유 능력이 부족함을 나타내는 사례가 된다. 19세기에는 물이 오염되면 과학기술적인 대처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런던의 템스 강이 오염돼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의 의원들이 마스크를 하고 다니지 않으면 업무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하수도 시스템과 상수도 시스템이 구분되지 않아 강으로 폐수가 통째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런데 의학자들과 생리학자들의 연구 덕분에 강으로 유입된 생활 오폐수 또는 산업폐수가 콜레라, 장티푸스 등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규명되면서 런던, 파리, 베를린 등 많은 도시에서 과학적 정수 시설을 설치하게 되었다. 또 20년 뒤 대부분의 미국과 유럽 도시에는 하수 정화시설과 함께 방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식수원이 오염되지 않게 하는 대책이 도입되었다. 이처럼 과거에는 도시가 물 치유 능력을 발휘하기가 쉬웠고, 기술을 바탕으로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도 명쾌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도시와 물에 관계된 이해관계자가 정말 많다. 특히 21세기 민주 사회에서는 비영리 섹터(NGO) 분야에서 활동하는 지식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이 환경 문제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정부나 기업이 독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제동을 걸고 있다. 기술을 바탕으로 명쾌하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제3섹터 분야 종사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민주적 방식’으로 물 문제를 고민하고 분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특정 기술이나 공법이 도입되어 수질오염이 대폭 개선된다 하더라도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문제 해결이 되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빠른 시간 내에 물이 치유되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설사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물의 기능이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회복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빠른 오염원이 되는 공업화, 느린 오염원이 되는 농업화

환경단체나 제3섹터 종사자들이 주로 주목하는 수질오염원은 공업화와 관련된 이슈들이 많다. 가령 19세기 말 일본에서 유명한 철광이었던 아시오 광산 반대 투쟁을 보면 현지 주민 수천 명이 반공해운동가와 함께 와타라세 강 주변뿐만 아니라 도쿄 시내 행진까지 벌이는 과감함을 엿볼 수 있다. 공업화로 인한 수질오염은 대부분 개별 기업의 탐심(貪心)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회사를 징벌함으로써 대중은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느끼도록 이슈를 관리할 수 있다. 1900년대 초 일본의 환경 단체들은 후루카와(古川) 재벌이 집단시설과 수질오염방지시설을 설치하게끔 법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어느 정도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광물을 원광석으로부터 분리할 때 생겨나는 황산이나 강산(强酸) 용액들이 계속 하천을 오염시키는 것은 막지 못했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 국면으로 들어가면서 전체주의적인 분위기가 생겨나자 아시오 광산 반대 투쟁가들의 구심점이 사라져버렸다. 정치 바람에 의해 반공해 운동이 완전히 무기력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업화로 인한 오염은 ‘빠른 오염원’으로 환경 전문가들의 이슈메이킹(Issue-making)에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또 다른 큰 흐름을 만나면 무력화될 가능성도 높다.

반면에 ‘느린 오염원’으로 작용하는 농업화 사례를 보면 과도한 비료 및 유기화학물질 사용은 하천을 깊게 썩어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로코의 옛 수도이자 유적도시인 페스(Fez) 일대는 화학비료가 포함된 폐수가 강 전체를 오염시켜 나머지 지금도 회복 불능의 사태라 한다. 간헐 하천인 ‘와디(Wadi)’가 지나가는 이 지역은 수백 년 전부터 발달한 가죽 세공업자들이 방류하는 폐수와 대농장들이 내보내는 동물 분뇨, 화학비료가 섞인 폐수가 함께 흐르는 곳이다. 페스는 7세기경부터 발전했던 상업도시로 모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디나’(좁은 통로로 이어지는 구시가지)로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이 지역이 1990년대부터 인근 지역 하천에 저지르는 어마어마한 오염에 대해서 고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역사문화적 유산으로 인해 환경오염의 사실이 가리워진 것도 있을 것이고, 공업화로 인한 빠른 오염이 아닌 ‘느린 오염’이기 때문에 환경운동가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농업화와 전통산업의 집적은 공업지대보다 더 깊고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는데도, 좀처럼 여론의 환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부영양화, 부영양화, 부영양화

필자는 이 책에서 ‘빠른 오염원’보다는 ‘느린 오염원’의 힘에 주목하고자 한다. 오염 물질이 하루 이틀 차원이 아니라 몇십년 단위로 축적되는 것을 다각도로 파헤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업 오염으로 인한 수질 문제는 기존 환경 운동가들의 노력과 투쟁으로 큰 성과를 이룬바 있다. 이미 우리 사회는 낙동강 페놀 사건 때 ‘페놀 아줌마’라고 불린 전직 환경부 장관을 배출한 적도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거대하천 중 상당수는 호수(湖水)가 같이 있는 경우가 많다. 70~80년대 군사 정부가 산업화와 경제개발의 용도로 대규모 댐을 여러 군데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하천들은 모로코 페스 시의 사례처럼 상류에 대규모 농경지나 농업을 영위하는 집락지(集落地)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느린 오염원’에 장기간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농업을 영위하는 공간에서 과도한 비료를 뿌리거나 동물 분뇨 등을 땅에 공급하게 되면 그 물이 고스란히 하천으로 흘러간다. 소나 돼지를 키우는 축사의 경우에는 필수적으로 정화시설을 설치해야 하지만, 농토의 경우에는 그 규정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비료, 분뇨 등에서 비롯된 질소나 인 등 은 물로 유입되어 갑자기 남조류나 대규모 식물이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를 가리켜 물에 영양이 과다하게 공급되어 생겨나는 ‘부영양화’(富營養 化)라고 부른다. 부영양화는 주로 폐쇄된 해역(海域)이나 호수에서 많이 발생 한다. 가령 유럽의 경우 이탈리아 북부의 포 강 삼각지 인근 지역에서 대규모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흘러나온 비료나 농약들이 하천과 아드리아 해안의 영양염류 상당수를 차지한다. 호수 전체를 통틀어 조류가 대번성하는 사례는 말할 것도 없다.

부영양화는 광합성 박테리아를 자주 만들어 내고, 이 박테리아는 기온이 떨어지거나 섭취할 수 있는 영양염류가 없어지면 죽어서 부식성 박테리아라는 물질로 바뀐다. 부식성 박테리아는 물속에서 산소를 잡아먹기 때문에 상당 기간 수중 생명력을 떨어뜨리며 생태계 교란의 원인이 된다. 흔히 말하는 낙동강 ‘녹조라떼’는 이런 종류의 부영양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느린 오염에 대한 규제는 왜 없는가

공업화로 인한 오염은 환경단체가 고발하거나 국가가 규제하여 제거하기가 쉬울 법 하다. 특히 요즘 들어 여러 국가의 환경 당국들이 공업 시설의 존폐를 좌우할 수 있는 인허가를 갖고 있기 때문에(조업정지, 영업정지 등) 더더욱 공업화에 대한 규율은 엄해질 것이다. 그러나 농업화의 유산으로 남겨진 비료 살포, 농약의 하천 유입과 같은 오염원들은 농부 개개인을 감시하고 단속할 수 있는 체계가 마땅치 않다. 설사 그들을 당국이 적발해 규제한다 하더라도 큰 제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마땅한 규제 없이 끈적끈적한 조류는 계속되고 있다.

물은 과연 축복인가. 우리는 인류 문명을 가능케 했던 이 생명의 원천을 계속해서 이용하고 저장할 만큼 가치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느슨한 법률과 제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강을 병들게 하고 있다.

비료의 유혹

20세기는 농업 규모가 확대되는 ‘녹색 혁명’의 시대이기도 하다. 물을 이용하는 방법이 발전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것과 함께, 품종 개량 등을 통해 곡물의 생산 효율성이 높아졌다. 1990년대 말 기준으로 지표면 식생 중 3분의 1 가량은 인간이 이용하기 위한 식물들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땅의 가능성을 최대한 이용해 먹고 살아가는 셈이다.

1850년경에는 전 세계적으로 270만 제곱킬로미터의 경작지가 농업을 위해 이용되었다. 그런데 1990년까지 그 수가 증가해 152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게 되었다. 140년 만에 약 5배 이상 규모가 늘어났다. 현대 국가는 국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환경을 최우선시하며, 작물의 자급자족 이외에 판매 목적으로 영위되는 농업을 매우 중시한다. 농업의 기계화 또한 규모화로 이어졌다. 영농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되었던 다양한 기술들이 작물 재배용 가축들의 이용을 감소시켰고, 더 많은 곡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증산(增産) 을 이끌어 냈다.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형 농업을 영위하는 국가들에서 공유되는 풍경이다.

반면 한국과 필리핀, 이집트를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은 1945년 이후 제국 주의 세력에서 해방됨에 따라 각 나라마다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빈농(貧農)이나 소농(小農)의 자립을 위한 정책들이 자주 사용되었다. 그 이전 시대에는 대지주(大地主)들이 적은 비용으로 농업 노동력을 착취해 가며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시스템이었다면, 2차 대전 이후에는 국가로부터 작게나마 땅을 불하받은 영세농들이 농장을 알아서 잘 관리해야 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1945년 농지개혁법(農地改革法)으로 인해 큰 규모의 토지를 지주 한 사람이 겸병(兼倂)하는 행태를 법으로 제한하게 되었다. 현대 자유민주주의국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다소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이 정책은 소농들이 자체적으로 농업 생산력을 갖추고 땅을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 헌법에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농지를 직접 경작하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지주가 영세 농업 노동자들에게 소작을 주거나 국가가 높은 세율로 경작된 쌀을 거둬들이는 관행을 반성하는 데서 나온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승만과 비료

이승만 정부는 가난한 농민들이 생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당 수준까지 농자재들을 지원해줘야 한다는 입장을 갖게 됐다. 여기에는 당시 야당 지분으로 농림부 장관이 됐던 죽산조봉암의 역할이 컸다.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까웠던 그는 국가가 농민들의 삶을 책임져 주는 수준의 지원 없이 절대로 농촌이 가난을 면할 수 없다고 봤다. 훗날 죽산조봉암은 자유당 정권의 음모에 의해 제거되었지만, 그의 농업정책 구상은 고스란히 이승만 정부의 프로그램이 됐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농기계 지원’과 ‘화학 비료 지원’이었다.

못 사는 나라가 환경, 생태를 염려한다는 것은 거의 사치에 가깝다. 50년대 당시에도 화학 비료를 많이 쓰게 되면 지력이 감퇴한다는 것은 서구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던 상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은 15세기부터 신 대륙(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대규모 영농을 실시하면서 지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식민지에서는 값싼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대량 생산을 하고, 구대륙 본국에서는 고소득 작물을 재배하는 전략이 고착화되었다.

수익성이 높은 채소, 과일 등은 모두 많은 비료를 필요로 했다. 1909년 무기질 비료가 개발되면서 서구인들은 약 50여 년 간 대규모 산업 농업에 동원해 보고, ‘무작정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일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또 화학 비료는 당장에는 생산량을 올려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지력을 감소시켜서 건강한 영농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친환경 농업’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가난한 농촌의 현실 때문에 ‘화학 비료’의 급격한 도입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환경을 생각하기에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농자재 보급이라는 미명 하에 농가들에게 화학비료가 보급됐다. 한반도에서 산업 문명은, 농업 문명을 억압할 수 없었다. 절대적 빈곤의 현실로 인해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의 농업 문명과 산업 문명이 가난이라는 상황에서 서로 교묘하게 섞이게 되자, 농업의 방향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일단 배고픔을 모면해야 하는 가난한 대한민국은 최대한 많은 생산량을 낼 수 있는 농법에 치중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공장식 농업’이다. 한반도에서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는 수천 년 간 계속됐지만, 모든 국민의 가난을 피하기 위한 운동은 민주공화정이 들어서고 나서야 현실화될 수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농지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원칙하에 농업 정책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저마다 최대 생산량을 올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비료의 유혹’은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일어났다.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농업 생산 기반은 ‘화학비료공장’에서 나온다. 김정일이 2011년 죽기 전 김정은에게 남긴 유언에서도 “2,8 비날론 연합기업소와 흥남비료공장, 남흥비료공장 세 곳만 정상화해도 농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화학비료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그 중에서도 북한의 ‘화학 비료 농업’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 흥남비료공장이다. 흥남비료공장은 함경남도 함흥 남부에 있는 흥남시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위치했던 ‘최첨단 과학기술 인프라’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는 흥남에서 원자폭탄 관련된 연구를 진행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기술력이 집적된 곳이었다. 북한 정권은 1954년 한국 전쟁으로 파괴된 ‘흥남비료연합기업소’를 복원하고 ‘질소, 암모늄 비료 생산 공정 자동화’를 적극 추진했다. 자동화 이후 흥남비료가 생산하는 화학비료는 연간 40만 톤에 이르렀다. 북한 정권은 여기서 대량으로 생산한 비료를 각지의 협동 농장에 배포했다. 그 명분은 남한의 이승만 정권과 동일했다. “가난에 서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생산량을 최대한 끌어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 역시 남한 못지않게 서구의 영향을 받은 도시형 엘리트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량 극대화’를 추종하게 된 사실은 정말 놀랍다.

먹고 살다보니 더럽히게 되었다

결국 남과 북 모두 “먹고 살다 보니 땅과 물을 더럽히게 되었다”는 맥락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비료의 어마어마한 위력은 경제가 성장해 선진국 수준까지 진입한 단계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이 2018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경지 1헥타르(ha) 당 비료 사용량은 2009년 기준 4.29톤에서 2017년 6.7톤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1헥타르 당 투입된 질소 량의 경우 2006년 대비 10% 증가한 166 킬로그램으로 미국의 79킬로그램, 일본의 95킬로그램을 훨씬 상회하는 수치다.

여기에는 정부의 비료사용 권장정책에도 큰 책임이 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이명박 정부는 맞춤형 비료 31가지를 농촌진흥청을 통해 내놓고 비료 가격의 30%를 국고보조금으로 지원했다. 농촌의 비료사용량을 줄이기는커녕 화학비료를 다양한 용도에 맞춤화 해 살포하는 방식으로 오염원 제공 형태가 진화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강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아예 생태계 자체가 죽어 버리는 ‘데드 존’(Dead zone)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하천과 대기를 통해 적조가 스며들어 그 안에 있는 생물이 숨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김현권 의원에 따르면 “1990년대 초 경남 북신만, 1990년대 말 경남 자란만과 전남 가막만 등에서 데드 존 현상이 발생했고”, “2000년대 초 충남 천수만으로 데드 존이 넓어졌다”. 그러나 비료업계의 여기에 대한 ‘해명’이 불충분해 보인다. 관련 협단 체인 한국비료협회는 2018년 8월 보도자료를 통해 “화학비료가 아닌 무기질 비료라는 이름을 써주길 바란다”면서,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유기질비료나 무기질비료나 흡수되는 형태는 모두 무기물로 영양분의 차이는 크게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또 비료협회는 “부영양화는 퇴비 등에 의해서도 유발되며, 수질 등 오염원의 실태를 보면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가축분뇨도 오염원의 하나로 조사된다”는 입장도 내놨다. 비료가 수질 오염의 원인 중 하나인가에 대한 답은 회피했다. 오히려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물과 땅을 더럽히게 됐다” 는 말이 훨씬 솔직해 보인다.

비료의 대량 공급은 작물 재배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질소비료나 각종 화학 성분에 의한 성장 촉진이 매우 효과적인 벼, 밀 등 경종(耕種) 작물에 농업 생산이 집중되고 다른 형태의 작목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중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인도네시아나 멕시코 같은 지역에서는 대규모 화학 비료와 품종 개량으로 인한 규모화가 1980년대 이후부터 소수 농부에게 농업 생산이 집중되는 효과를 낳았다. 풍부한 수자원과 신용 능력을 갖추지 못한 농부들은 비료나 농약을 구입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고, 투자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 대량의 농산물을 출하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농업으로 더 이상 먹고 살지 못하고 도시나 다른 지역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유기농’이 답인가

비료는 토양의 화학화와 지력 감소를 동반하기 때문에 아예 이를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 농작물을 재배하는 ‘유기농’을 지향하는 농부도 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유기농 운동이 시작됐다. 가톨릭 농민회나 한 살림, 흙살림 운동 등을 지향하는 농민 운동가들이 생태 농업을 통해 우리 땅의 건강함을 회복하고자 만들어낸 움직임이었다. 일련의 행동은 농민들이 식량 주권을 찾음과 동시에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갖게 한다는 의의가 있었다.

팔당 유기농 시범단지

유기농 전문가들은 과거 근대화 이전 농업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천연 비료(동물이나 사람의 분뇨, 풀을 태운 재 등)들을 농사에 투입한다. 화학 비료보다는 훨씬 지력 감소도 덜하고 농산물에 남는 성분도 적다는 점에서 좋은 대안이 었다. 또 유기농은 농약 없는 농업을 뜻하기도 한다. 벌레 먹은 배춧잎이나 다소 겉에 생채기가 난 채소들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데 가치를 부여해 적극적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지난 10년 동안 유기농산물 시장은 3배 이상 증가했다. 국내의 경우 유기농법과 무농약법으로 재배한 ‘친환경 농산물’ 시장 규모는 1조 3608억원 가량(2017년 말 기준)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유기농이 화학적인 면에서는 안전하지만, 생물학적인 안전성 면에서는 취약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그 가치에 대해 회의를 품는 사람들도 생겼다. 농산물에 화학비료를 치지 않기에 잔류농약이나 중금속의 위험을 걱정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곰팡이, 기생충, 세균 같은 것들을 염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잎채소나 표면이 넓은 야채류들의 경우 틈새로 갖가지 균이 파고들 수 있어 미생물 오염의 위험이 크다.

또 유기농 재배 과정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것은 인간과 동물의 분변을 사용해 양분을 줄 때다. 이 양분은 비가와도 완전히 씻겨 내려가지 않고 땅에 남아 과일과 채소를 오염시킬 수 있다. 만약 하천으로 흘러 들어간다면 그대로 영양염류가 되어 부영양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유기농 보호론자들은 이 견해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다. 유기농 운동가인 캐서린디마티오는 2010년 9월 한국을 방문해 4대강 사업으로 철거 위기에 놓인 천변(川邊) 유기농 단지들을 옹호하며, “유기농이 수질오염원이라는 것은 금시초문”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당시 정부는 한강 팔당 지역과 낙동강의 부산 삼락 유기농 단지를 철거하며 하천의 부영양화 원인을 제거하려던 상황이었다.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뿌린 천연비료가 강까지 스며들면 당연히 수질오염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만, 디마티오를 비롯한 유기농 운동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기농이 허용되고 있는데 무슨 일이냐”라며 문제의 본질을 회피 했다. 한국의 환경단체도 “한 마디로 헛짓”이라며 “수질개선과 환경보호를 위해 농민이 자발적으로 일궈 온 땅”이라고 하천부지 유기농업가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각종 퇴비와 농업용수가 곧장 하천으로 스며들면서 취수원을 오염시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환경운동가들의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 환경운동단체는 2007년 “100종의 화학물질이 팔당상수원을 위협한다”고 지적했지만, 2010년에는 팔당 유기농 단지의 농업오염을 “일반 농업 이상으로 취수원을 오염시킨다는 근거가 없다”며 비호했다.

‘빠른 오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물을 오염시키는 ‘느린 오염’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하는 현 세대의 걱정거리여야 한다.

– 김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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