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운동이 자연신 숭배인가

문경환 순천고·경인교대 졸. 서강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석사. 성균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부분 신진연구인력. 현) 정신문화연구원 ‘刀化’ 대표원장.

2018년 6월 치러진 지방선거는 매우 독특한 선거였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치러진 대선의 여파로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강세가 두드러진 가 운데 분열된 보수의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 그리고 진보진영의 민주평화 당과 정의당이 분전을 벌이는 선거였다. 결과는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소셜 미디어가 점점 선거에서 활성화되는 국면에서 여러 군소 정당들의 특이한 후보들과 관련된 면면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례가 ‘녹색당’이다. 20~30대 젊은 여성들을 후보로 공천하며 ‘여성주의’를 전면에 내건 것이다. 전통적으로 원자력 발전과 댐 건설 등에 반대하던 근본 주의 진보 정당이었던 녹색당이 여성 문제를 본격적인 정책 의제로 포함시킨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아주 ‘묘한’ 일이 일어났다. 제주도지사 후보로 고은영을 공천하며 새로운 비전을 선포했던 녹색당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당시 고은영은 “동부 오름 군락을 헤매며 속도계가 고장난 저를 다스릴 때 만난 설문대할망의 영성은 그 자체로 삶의 나침반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설문대할망은 육지에서 마고할미라고도 불리우는 유명한 지모신(地母神)이다. 일본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 비견되는 여신이기도 하다. 녹색당원들은 고은영이 설문대할망의 현신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지역사회의 환경 의제들을 선거 전략에 포함시키는데 애썼다. 일종의 ‘환경 애니미즘’(정령숭배)이다.

고은영은 제주의 개발세력과 정치세력 간의 ‘절연’을 주장했다. 그는 제주 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해체론을 언급하며 그 이유로 “제주 난개발의 주역이자 공익적 성격의 1차 산업을 상업적으로 변질시킨 마피아”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이제 제주에서는 청년이 빚을 내가면서 살아야 한다”며 “설문대할망께서 땅을 치며 통곡하실 일”이라고 또 지모신을 공론장에 끌어들였다.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는 국토교통부 산하기관이다. 정당 후보가 그 조직의 해체를 주장하며 토속 신앙의 여신(女神)을 상징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은 ‘환경 애니미즘’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애니미즘은 분명 힘을 갖고 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 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시인 김소월(金素月)이 1922년 ‘개벽’에 발표한 ‘엄마야 누나야’는 20년대 말 ‘카프 문학’(사회주의 좌파 문학)이 유행하던 시기 ‘한국적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김소월은 일제의 문화 통치가 깊게 뿌리내린 20년대의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했던 지식인들을 ‘자연’으로 회귀시키고자 했던 것 아닐까 싶다. ‘강변’은 매우 흔한 자연 공간이지만 그 시절 엄마와 누나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강변은 한반도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김소월은 강변이라는 공간에 태초의 생명력과 따뜻함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종류의 문학적 상상력과 의인화는 매우 가벼운 수준의 ‘애니미즘’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위로의 기능에 대한 믿음인 셈이다. 숲과 자연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는 마음 한 구석에 애니미즘적인 믿음이 조금씩 자리 잡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작품인 ‘이웃집 토토로’도 동화적인 애니미즘의 대표 사례다. 극중 주인공인 11살의 여자 아이 사츠키는 네 살 배기 동생인 메이와 함께 시골로 이사 온 아이다. 작품 배경은 1955년, 한국 전쟁이 끝난 후 경제 성장으로 ‘재산업화’가 시작된 일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츠키의 아버지인 쿠사카베 박사는 도쿄의 대학에서 비전임 교수로 일하고 있는 이공계 연구자다. 사츠키네 가족은 도쿄의 병원에 입원한 엄마가 퇴원한 이후 요양할 ‘전원’(田園)을 찾아 시골로 이사한 상태였다.

사츠키가 시골의 초등학교에 간 뒤, 동생 메이는 숲에서 놀다가 눈 앞을 지나는 이상한 동물들을 발견하게 됐다. 그 동물들이 이끄는 길을 따라 걸어간 메이는 도토리 나무 밑둥에 떨어지게 되는데 거기에는 숲의 요정 토토로가 살고 있었다. 일종의 지신(地神)인 셈이다. 메이가 집으로 돌아와 언니에게 토토로 요정 이야기를 들려 주지만 사츠키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비가 많 이 오던 날 사츠키는 아버지를 배웅하러 버스 정류장에 나갔다가 우산 없이 비에 젖고 있는 토토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사츠키는 토토로에게 우산을 빌려주고 그 답례로 도토리 열매를 받는다. 그저 환상 속에나 존재하던 애니미즘을 실제로 접하게 되고, 일상생활에서 체화하는 과정인 셈이다. 그 뒤 ‘이웃집의 토토로’는 엄마의 병으로 퇴원이 늦어지는 과정에서 불안해 하는 사츠키 가족을 위로하는 존재로서 토토로의 역할을 매우 세밀하게 그려 낸다.

이처럼 애니미즘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고향’에 대한 동경, 태초의 상태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한 상상력의 힘을 갖고 있다. 인간의 사고를 더욱 풍부하게 해 주고, 산업 문명 속에 찌들어 있었던 현대인의 머릿속을 농업 문명의 자유로움으로 이행시켜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애니미즘이 종교가 될 때

그러나 애니미즘은 꼭 긍정적 기능만을 하지 않는다. 앞서 고은영의 사례에서처럼 애니미즘은 환경 정치와 만날 때 매우 강력한 종교적 신념이 될 수 있 다. 비슷한 예가 ‘제주 구럼비 바위 폭파 반대 운동’이다. 강정마을 제주 해군 기지 건설과 관련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가지고 있었던 환경 운동가들은 항구 개발을 염려하는 지역 주민들과 연합해 “구럼비 바위를 살려주세요”라는 캠페인을 만들어 냈다. 바위를 의인화해 ‘살려달라’는 주장은 마치 생명 파괴의 연장선상으로 읽히면서 전국을 요동치는 이슈로 변화시켰다. 노무현 정부 당시 강정마을 해군기지 창설에 찬성했던 한명숙 전 총리는 민주통합당 대표(야당 대표)가 되자 마자 ‘구럼비 살리기’ 캠페인에 가담했다(물론 한 총리의 태세 전환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갖는 제주 환경운동가들도 있었다).

구럼비바위를 생물화하는 시도 또한 일종의 애니미즘이라고 볼 수 있다. 몇 몇 운동가들은 구럼비바위가 독특한 가치를 갖고 있어 무조건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주도의 다른 해안들을 살펴 보면 구럼비 바위 지대는 제주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현무암 지형 중 하나에 불과했다. 게다가 강정마을 일대의 동물 생태가 다른 제주도 지역들과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한 맥락이다.

“구럼비바위를 살려주세요” 운동은 과거 노무현 정부 당시 천성산 철도 터널 반대 운동에서 도룡뇽 등이 활용되었던 수준에서 훨씬 퇴행된 것이다. 생태주의 운동이 지모신 사상이나 자연 정령 숭배 쯤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2003년 당시 ‘천성산 터널 반대 운동’을 되짚어 보자. 이 운동을 주도한 승려 지율(세속명 조경숙)은 부산권의 환경운동단체들과 연합해 ‘꼬리치레도룡뇽’이라는 희귀종을 원고로 내세워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동물이 원고 자격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사 중지 가처분 소송을 수 차례 기각(2003년 1차 기각, 2004년 지율 스님의 항고 후 재기각, 2006년 재항고 후 3차 기각)했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인간계’의 재판 원고로 끌어들인 사태는 대한민국 법조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형태의 극단 환경 운동 사조가 숨어 있다. 인간 존재를 다른 생명체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평가하려는 생태근본주의다. 생태주의자들 중 가장 강경한 사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간의 자연 개발이 산신이나 용왕을 노하게 하면, 불행이 닥칠 수 있다.”

이 메시지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자연적 권위는 꿈이나 터부(taboo)와 같은 인간의 잠재 의식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존재들이다. 지율스님의 천성산 터널 반대 운동은 한국 환경 운동계가 닥치는 대로 끌어다 쓰던 자연 정령 숭배 사고방식의 총집합이었다. 산신을 대변하는 신체(神體)로서 도룡뇽을 설정하고, 법정의 원고로 세움으로써 환경 논쟁을 신비주의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자연정령숭배 생태주의는 권력 획득 운동이다

자연 정령 숭배형 생태주의 운동은 권력 획득 운동이다. 진보 정치 운동에 속하는 환경 운동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토착민들을 규합하는 데 제법 주효한 슬로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생태주의 운동은 극좌가 될 수도 있고 극우가 될 수도 있지만 두 가지 방향이 지니는 공통점이 있다면 ‘전근대 사회에 대한 동경’이다. 산업화 이전 시절의 사회 경제 시스템을 마치 목가적이고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바라보는 시각 말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던가.

게다가 자연 정령 숭배는 전근대적 미신의 사고를 그대로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되며, 대중 선동을 감정적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에도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그 옛날 사람들은 깨끗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고통받다가 짧게 살고 죽어갔음에도 말이다.

에코 파시즘

자연정령숭배형 환경운동이 지니는 또 다른 위험은 우리가 근대화 과정에서 경험했던 모든 의사소통 절차의 민주주의를 깔아뭉갤 수 있다는 것이다. 정령 숭배는 신과 가까운 제사장이나 중개자들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무녀들이 상담자들에게 반말을 하며 미래를 예측해주는 것도 같은 원리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꼭 필요한 비합리적 권위의 배격, 사실관계의 정확한 파악이라는 덕목들을 모두 삭제한 채, 자신의 권위에 호소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또 자연 정령 숭배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비합리적 공포심을 자극해 세뇌와 선동을 가능하게 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세기 군국주의 파시즘 조류다. 나치의 선동가이자 홍보 담당 장관이었던 괴벨스는 기독교를 비롯한 전통 고등 종교들이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매우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특히 나치 치하에서는 근대적 교육 개혁가들에 속하는 개신교 목사들에 대한 탄압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괴벨스는 독일 민족에게 자연 정령숭배의 위력을 행사하기 위해 고대 게르만 신화의 상징들을 빈번하게 끌어 왔다. 히틀러는 오딘 신을 비롯한 ‘발할라’(게르만 신화에서의 천국이자 이상세계) 절대자들의 대변자처럼 여겨졌으며, 나치 당(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은 그 이상을 실현하는 조직 체계로 비유되었다.

자연 정령 숭배를 이용한 생태주의도 같은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 요즘 들어 극단적인 환경운동가들을 가리켜 ‘에코 파시스트’(Eco-Fascist)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그들은 20세기를 지배했던 파시스트들과 ‘반지성주의’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생태주의자들은 ‘근대’를 제거하거나 정화하면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적 과거로 복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대강 보는 무조건 철거되어야 하며, 물이 흘러야 하며, 강변에 위치한 공장이 없어지면 아름다운 환경이 회복되고 과거의 동화적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과거 따위 우리 역사에 없었다는 것이다. 전 근대 사회는 가부장 질서와 폐쇄적 집단주의 논리가 개인을 억압하던 시대였는데, 환경운동가들의 머릿속에서는 일련의 아픔들은 모두 삭제된 채 그 옛날로 돌아 가면 우리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현실 호도가 숨어 있다.

왜 우리가 그토록 근대화에 매달려 왔는가

심훈의 ‘상록수’라는 작품이 있다. 농촌이 저개발되어 있었던 일제 강점기, 도시에서 교육받은 젊은 청년들이 직접 농촌으로 뛰어들어 농민의 삶을 낫게 하고자 했던 ‘브나로드 운동’이 그 배경이다. 브나로드는 러시아 말로 ‘민중속으로’라는 뜻이다.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농민들이 자치공동체를 갖고 있었기에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이들을 중심으로 노동자화를 거치지 않고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1870년대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 중 2500명이 농촌으로 뛰어들어 마을 개량사업, 문자 교육 사업 등을 진행하고 농민들을 사회주의 대열에 편입시키고자 노력했다. 물론 이 시절 러시아 혁명은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전이었기 때문에 본토에서의 브나로드 운동은 실패했다. ‘산업 문명’의 혜택을 받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농업 문명의 장으로 뛰어들어 나름대로 근대화를 통해 정치 변혁을 꾀했던 사건인 셈이다.

‘상록수’는 러시아 본토에서의 브나로드 운동이 좌절한 이후 1920년대 조선의 청년들이 농촌으로 뛰어들어 계몽운동을 펼칠 시절의 이야기다. 여주인공 채영신과 남주인공 박동혁은 모 신문이 주최한 농촌계몽 집회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각자 학교를 그만두고 저마다 시골로 내려가 투쟁 현장에서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 나간다. 채영신이 주력했던 사업은 야학이었다. 채영신은 교회당을 빌려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점점 수용 능력에 한계가 생기자 야학당을 새로 지을 마음으로 애를 쓰다 몸을 상하게 되었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안타까운 이야기가 ‘상록수’의 스토리다.

이 시절 소위 시민사회 운동가들은 처절하게 ‘근대화’에 매달려 왔다. 운동가들은 농업 문명 치하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터부와 비합리적 관행을 해소하기 위해 농민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일깨우고자 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의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근대는 개인성과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의 발견과 연관이 있다. 공동체와 신분제에 의해 억압받았던 사람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새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시민운동가들이 주창한 근대화의 방향이었다. 이러한 ‘근대’에 대한 강할 만큼의 집착은 훗날 산업화 시대에도 이어져 ‘조국 근대화’라고 하는 매우 독특한 이데올로기로 진화했다. 물론 여기에는 군사정권의 그림자를 비롯해 다양한 부정적 단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의 물적 기반을 성숙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한국의 환경 운동은 근대 부정 운동이다

초자연적 권위, 종교적 권위를 애써 빌려 가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한국의 환경 운동은 마치 ‘근대 부정 운동’을 보는 듯 하다. 우리가 직면한 근대는 ‘산업 문명’의 폭력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기에 그것을 갈아 엎어야만 진정한 유토피아가 찾아온다는 믿음이다. 한국의 환경운동계에서는 과거 민주화 시대의 경험과 맞물려 보수 세력을 타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도 ‘근대 부정’이 이용된다. 독재 시절 모든 공론화 절차를 생략한 채 무작정 공장을 세웠던 정부를 비판하며 그 수혜자인 기업까지 싸잡아 욕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기업들은 ‘자진 납세’를 통해 환경단체와 타협하거나, 아니면 끝까지 욕을 먹으며 여론 재판을 견디느냐 선택해야만 한다.

근대 부정 운동은 또 다른 의미에서 반지성, 반전문가주의 운동이기도 하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환경 파괴 이슈를 설명하는 ‘산업문명’의 지식인(교수, 국책연구원, 변호사 등)들은 정부나 기업에게 매수된 세력으로 욕을 먹는다. 그들의 통계와 분석 자료는 전부 누군가에 의해 섭외된 결과물로 전락해 버리고, 환경운동가 자신들이 주도하는 공론화 과정과 자료 생산만이 옳다는 믿음이 확산된다. 누군가가 낭만적으로 이야기한 ‘초자연 정령숭배’의 비유가 어디에선가는 이성과 합리적 지식에 기반한 근거를 말살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참 무서운 일이다.

– 문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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