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지정학과 동북아 수퍼그리드

김일명 한반도평화에너지 객원편집위원장, 기술정책 박사

지정학이라는 학문이 있다. 국가나 조직의 지리적 위치가 권력의 향배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크게 네 가지 학파로 구분된다. 가장 첫 번째가 ‘해양력 이론’(Sea power theory)이다. 해군 제독 출신 알프레드 머핸(Alfred Mahan)이 들고 나왔다. 대영제국이나 네덜란드처럼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관점이었다. 두 번째는 중심지(heart land theory) 이론이다. 탐험가인 해퍼드 매킨더라는 지리학자가 만들어 낸 관점이다. 중부유럽·동유럽·중앙아시아와 같은 대륙의 중심 지대를 차지한 자가 세계의 패권을 장악할 거라는 이야기다. 매킨더는 ‘유라시아’(Eurarsia)라는 국제정치학계 최고의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지정학의 세 번째 주류 이론은 ‘생활공간 이론’(Lebenslaum theory)이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대동아공영권의 기초 사상 역할을 했다. 이론의 창시자인 하우스호퍼(Haushofer)는 독일 민족의 영화를 위해 그 생활권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팽창주의에 몸과 마음이 달았던 전전(戰前) 일본 군부 구성원들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지정학 이론이 주변지 이론(Rimland theory)이다. 중심지는 여러 나라들과 접해 있기 때문에 눈 돌릴 경쟁자가 많지만 주변지는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기에 때로 더욱 위험하다. 지리학자 존 스파이크만은 주변지역과 중심지역이 결합되는 시나리오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변지역은 대부분 해상과 밀접하며 농식품업이 발달해 있어 경제력·군사력이 커 나가기 좋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권국이 되고자 하는 나라는 주변지역을 활용해 중심지역의 팽창을 경계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냉전 시대 서방 진영 국가들이 이 전략을 잘 써먹었다. 미국이 대륙 또는 중심지에 위치한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한국,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국가들이 집중 육성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대동아공영권의 기초 사상 역할을 했다. 이론의 창시자인 하우스호퍼(Haushofer)는 독일 민족의 영화를 위해 그 생활권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팽창주의에 몸과 마음이 달았던 전전(戰前) 일본 군부 구성원들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지정학 이론이 주변지 이론(Rimland theory)이다. 중심지는 여러 나라들과 접해 있기 때문에 눈 돌릴 경쟁자가 많지만 주변지는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기에 때로 더욱 위험하다. 지리학자 존 스파이크만은 주변지역과 중심지역이 결합되는 시나리오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변지역은 대부분 해상과 밀접하며 농식품업이 발달해 있어 경제력·군사력이 커 나가기 좋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권국이 되고자 하는 나라는 주변지역을 활용해 중심지역의 팽창을 경계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냉전 시대 서방 진영 국가들이 이 전략을 잘 써먹었다. 미국이 대륙 또는 중심지에 위치한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한국,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국가들이 집중 육성 되었다.

한반도, 정체성이 모호해 지고 있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부소장인 마이클 그린은 2014년 경 “한국이 해양국가이자 동시에 대륙국가인 것처럼 보인다”는 해석을 내놨다. 역대 보수 정부 중 가장 중국과 가깝다고 여겨 지던 박근혜 정부 시절 이야기다. 당시 한국은 미국·일본과 깊은 정체성 차원의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이들 나라는 공산 세력의 침입을 막아 주는 해양 공간으로 이어진 동맹국이라는 점에서 강력하게 연대했다. 그 관계는 냉전 체제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 간의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극대화되면서 한반도는 대륙세력과의 연계성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14년 5월 ‘아시아 교류 및 신뢰 구축 회의’에서 중국은 여러 국가들에게 “아시아에서 기존 동맹과 블록을 해체하며 새로운 유라시아 안보 체제에 가입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에 사인하게 만들었다. 경제 규모를 불려 다시 아시아의 상국(上國)이 된 중국이 여러 국가들에게 제기한 압력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 성명에 사인하는 것을 거부했다. 중국은 미국 중심의 해양 세력 공간을 상쇄하기 위해 꾸준히 공을 들였지만 상호방위조약으로 묶인 한국을 자기네 질서에 완전히 끌어넣는 데에는 실패한 셈이다.

그 사이 한국과 중국은 ‘사드 배치’와 ‘한한령(限韓令)’이라는 거대한 1차적 장애물을 만나 관계가 좌초될 위험에 처했으나 문재인 정권 출범 후 다시 그 관계는 개선되는 모양새다. 특히 북한과의 평화 체제 구축이 한국의 중요한 과제가 되면서 점차 대륙 세력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포석이 생겼다. 북한은 한국이 중국, 러시아 등 대륙 국가와 연결되는 지렛대 역할을 하는 입장이 됐다. 마이클 그린 박사는 약 5년 전 한국이 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북한이 핵(核)이라는 전략적 자원을 갖고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의 연계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렛대’는 서로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 주는 윤활유라기보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게 양자 간을 합쳤다가 이간질시키기도 하는 매우 얄궂은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김정은은 필요할 때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손을 뻗지만, 핵 문제와 경제 개방에 있어서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논의 상대가 된다. 한국이 이 관계에 끼어 있어 봐야 거래비용만 증대시킬 뿐이다.

오히려 한국은 중재자 또는 지렛대라기보다 북·중·러 세력의 부분집합이라도 된 것처럼 읽히고 있다. 얼마 전 서울시 의회가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 기념’ 전시공간을 의사당 로비에 만들었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반 시민들은 “왜 국군의 날이나 한글날을 기념하지 않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을 축하하느냐”고 지적하거나 “한때 중국은 6.25 전쟁으로 싸웠던 국가인데 그들의 건국을 서울시의회가 돈까지 들여가며 성대하게 축하하는 것이 과연 맞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부산광역시청도 부산진 시장 앞 육교에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기념하는 현수막을 걸었다가 세게 야단을 맞았다. 여러 모로 “한국은 자신이 해양 국가이자 대륙 국가인 반도라는 사실에서 파생되는 지정학적 함의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마이클 그린의 분석이 교묘하게 맞아떨어져 가고 있다. 한국의 국제정치적 정체성은 매우 모호해 지고 있다.

동북아 수퍼그리드 개념도

동북아 수퍼 그리드, 유럽만큼 구체화될 수 있을까

서울시의회와 부산시의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기념 현수막 사건은 한국과 대륙세력과의 심리적 연결을 뜻한다. 이와 별도로 한국과 중국을 물리적으로 잇고자 하는 시도도 있다.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 몽골, 러시아 등을 가스관 또는 전력망으로 잇는 ‘동북아 수퍼그리드’를 만들자는 이야기다.

유럽 대륙에는 이미 국가 간 전력 교류 인프라가 시도되고 있다. 라인 강이나 다뉴브 강처럼 여러 국가를 가로지르는 하천이 존재하기에 비슷한 아이디어에 착안해 전기나 가스, 석유 같은 것들도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운반되게 하자는 것이다. 몇 가지 선례가 있다. 2009년 독일, 프랑스, 영국과 노르웨이, 스웨덴과 같은 북해 연안 국가들이 모여 ‘북유럽 수퍼그리드’를 만들었다. 에너지정보문화재단(2019)에 따르면 이 수퍼그리드가 유럽 전역 시장에 공급하는 전력량은 연간 25~30 기가와트 가량이다. 북해 해상에 총 7천 기 가량의 풍력 발전기를 깔아 2020년까지 100기가와트까지 생산 가능하게 하고, 2050년에는 500기가와트 가량의 전력량이 인접 국가들에 유통되게 하자는 것이 북유럽 수퍼그리드 구상이다. 국가 간 협력 뿐 아니라 기업 간 협력도 미국의 제너럴 일레트릭(General Electric), 독일 지멘스(Siemens), 프랑스 RTE 같은 거대 기업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북유럽 수퍼 그리드

북유럽 수퍼 그리드 이외에 남부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을 잇는 수퍼그리드(Sud-EU-MENA supergrid)도 있다. EU가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초대형 태양광 발전소를 짓고 여기서 이탈리아의 몰타 섬으로 전기를 끌어 모으는 작업이 이미 진행 중이다. 약 2000메가와트의 설비용량이 공급될 것으로 보인다. 남프랑스까지도 같은 수준의 전력망이 계획되어 있다. 일련의 기획들은 지난 1983년 알제리에서 이탈리아로 가스가 공급되는 파이프라인이 건설된 선례도 있기에 영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반면에 ‘동북아 수퍼그리드’는 얼마나 가능성이 있을까. 국내 전력 분야 유관기관들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1) 서울에서 북한의 나진까지 전력망을 건설하는 작업과 (2) 서울에서 해저케이블을 통해 중국의 웨이하이까지 고압직류(2기가와트 규모)가 흐르는 전력망을 짓고, 다시 (3) 서울에서 평안북도와 중국의 헤이룽장성, 네이멍구(內蒙古)까지 아우르는 전력망까지 완비되면 여러 국가 간에 효과적으로 에너지를 교류할 수 있다고 한다. 덤으로 일본의 규슈 지역과 부산 간에 2기가와트 간의 해저케이블이 깔리면 동북아를 관통하는 전력네트워크가 완성된다. 한전 측은 “국가 간 전기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비용이 낮은 지역에서 싼 전기를 수입해 전기요금을 줄일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가령 “한국, 중국, 일본 등 선진국과 몽골, 시베리아 내부는 전기요금이 최대 20배 이상 차이”가 나는데 “전기료가 싸고 낙후된 곳에서는 에너지 수출로 상당한 이득을 볼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물류 인프라인 철도까지 더해져 사실상 한국을 ‘유라시아 경제권’으로 편입시킬 수도 있는 구상이 덧칠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매킨더의 중심지 이론도 크게 틀리지 않는 것처럼 읽힌다. 한반도가 아시아 대륙의 한 귀퉁이에서 심장부로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 덕분이다. 그 옛날 대륙을 말 타고 달렸던 징기스칸, 고구려의 강역을 최대한 확장했던 광개토대왕 같은 사례를 들어 ‘북방의 꿈’을 동화처럼 읊는 사람도 있다. 얼핏 다채롭고 산뜻해 보인다.

수퍼그리드의 위험성은 없는가

한반도 중심의 아시아 수퍼 그리드 개념도

동북아수퍼그리드는 잘만 기획되면 유럽에 존재하는 수퍼그리드 이상의 효과를 누릴 것이다. 상호 긴장관계에 있는 한·일 관계, 언제나 불안덩어리인 남·북 관계, 한한령 등의 위험이 존재하는 한·중 관계를 전력망이라는 상호 의존적 네트워크를 통해 어느 정도 완충시켜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정치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증가시키기도 했음을 고려해 볼 필요도 있다. 특히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대륙세력들과 만들어진 관계 속에서 있었던 상황들을 떠올려 봐야 한다. 중국은 제조업, 서비스업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의 수·출입 네트워크를 이용해 한국을 협력 파트너로 활용함과 동시에 부분집합으로 포섭하기 위한 전략을 계속 사용해 왔다. 북한은 핵을 통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간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험요인이 된다. 개성공단·금강산관광 등이 그 자체로 경제 교류이면서 때로는 정치적 위험을 제공했던 원인이었음은 더 복기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미국 언론을 통해 “2020년 11월 대선까지 북·미 정상회담은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비핵화와 관련된 뚜렷한 진전 없이 북한과 협력 관계를 조성하지는 않겠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국면에서 북한을 통과해야 하는 동북아 수퍼 그리드 구상은 별로 현실적이지 않다.

국가 간 전력망이나 에너지 수송망이 치명적 약점으로 작동한 사례는 러시아 산 ‘가스라인’을 둘러싼 이해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06년 1월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측에 가스 가격 4배 인상안을 받도록 요구했다. 친(親) 서방 국가로 변모하고 있었던 우크라이나의 유시첸코 정권은 이 문제를 국가 간 외교 문제로 비화시켰다. 그러자 러시아는 같은 달 4일 우크라이나 행 가스 공급을 중단하면서 해당 지역을 경유해 러시아 산(産) 가스를 공급받는 헝가리·오스트리아·독일 등이 연쇄타격을 입게 했다. 결국 당시 유럽연합 의장국이었던 오스트리아가 나서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분쟁 피해를 유럽 전역으로 확대시키지 말라”고 경고하자 러시아는 “유럽 국가에 대한 공급량을 9천 500만 제곱미터씩 늘리겠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에너지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많은 유럽 국가들은 불신의 입장을 갖게 됐다.

이런 경험 때문에 유럽연합(EU)은 2016년 단일 국가의 특정 기업이 에너지 수송망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내놨다. 러시아의 가즈프롬은 북해를 통해 북독일까지 들어가는 노드스트림 파이프라인(Nodstream pipeline)을 독점하고 있다가 올해(2019년)부터 전체 수송용량의 절반까지만 이용하게 되었다. 또 유럽 연합의 관련 법률에 따르면 제3자가 원할 경우 에너지 수송망에 접속할 수 있도록 사업자가 허락해야만 한다. 러시아는 노드스트림 파이프라인 중 2번째 네트워크(남독일까지 연결되는 망)가 완성되면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에 가스공급을 그만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폴란드 정부도 최근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로부터 LNG(액화천연가스)를 수입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나선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美 의회 상원은 2017년 7월 13일 러시아 에너지 수송용 파이프라인을 지원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집중 제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장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법안 통과에 반발하며 외무부 장관 명의 성명을 발표했지만, “러시아가 더 이상 가스관으로 유럽대륙을 휘젓도록 두지 않겠다”는 미국의 강경한 입장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현재 러시아는 연간 1600억 세제곱미터 가량의 액화천연가스를 유럽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전체 유럽 내 공급량의 40% 비중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결국 가즈프롬 사는 서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눈을 돌려 새로운 시장을 만들 기회를 찾고 있다. ‘시베리아의 파워’(Power of Siberia) 프로젝트는 이르쿠츠크에 위치한 러시아 가스전에서 수송관을 러중 접경지대까지 이어 중국 내 파이프라인과 잇는 프로젝트다. 이외에 알타이(Altai) 프로젝트가 시도되고 있다. 몇몇 국내 산업 전문가들은 이런 러시아의 노력에 부응해 “북한과 연해주를 잇는 가스파이프라인을 만들어 보자”는 구상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얼마나 동북아 에너지 협력에 도움이 되는 구상인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러 모로 대륙으로 이어진 국가 간의 전력망은 서로 시너지가 나기보다는 갈등의 원천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수퍼그리드 구상’, 러시아 가스라인 재탕 우려돼

유럽의 수퍼그리드 성공사례가 그대로 동북아시아에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도 자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북유럽 수퍼그리드 전략, 남유럽-북아프리카-중동 수퍼그리드 전략과 지금 한·중·일 간에 논의되는 동북아 수퍼그리드는 접근 방식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유럽의 경우 수퍼그리드 참여 국가들이 북해 해상이나 북아프리카 대륙과 같이 별도의 공간에서 전력을 생산해 각국으로 분배하는 구조다. 반면에 동북아 수퍼그리드는 네이멍구(중국)나 러시아와 같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특정 국가에 전원(電源)을 두고 각국으로 전력이 수송되는 방식이다. 유러피안 그리드보다는 러시아 산(産) 가스파이프라인이 동북아 수퍼그리드 구상에 더 닮아 있다. 공급자가 소비자에게 갑질하기 좋은 구조가 형성되기 쉽다. 우리 정부는 한반도가 러시아, 중국, 몽골, 일본 등을 잇는 중심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개자로서 역할하기 좋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력의 생산성보다는 소비성이 높은 국가가 얼마나 제 위치를 고수하며 국제 관계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 지금처럼 해양세력보다는 대륙세력으로 무게추가 점점 더 옮겨져 가는 상태에서 한국이 계속 균형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인접 국가들끼리 사이좋게 전기를 나눠 쓴다는 동북아 수퍼그리드의 구상도 실체가 불명확하다. 유럽의 경우에는 국경을 뛰어넘는 전력 회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기술력과 시공능력 뿐만 아니라 자본력에 있어서도 탁월한 지멘스, RTE의 참여로 인해 기업의 역량과 시장성이 함께 확보되는 구조다. 반면에 한국이나 중국, 일본의 기업들이 몽골이나 러시아 지역에서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바탕으로 얼마나 사업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토목 공사의 규모는 클 수 있겠지만 지속 가능한 전력망으로 작동할 지는 관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사업을 진행하는 당사자들 상당수가 한전 등 국영기업이다. “나라 밖에 전력 인프라를 설치하는 데 국민의 세금을 들이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다. 큰 규모의 사업을 통해 전력 기업의 경쟁력이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을 써가며 국제정치적 리스크를 떠안는다는 비난도 우려된다.

결국 미국·일본의 입장이 중요하다

동북아 수퍼그리드가 안정적인 국가 간 전력 교류 인프라로 인준받기 위해서는 결국 미국과 일본의 입장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 역학구도에서 해양세력의 핵심 축을 차지하는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륙의 끝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전력망을 연결하면서도 중국·러시아 등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지 않을 만한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당장 유형의 자원이 오가는 그리드를 설치하는 것보다 동북아 국가들이 에너지 기술을 함께 연구하는 지식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 제안해 본다. 정치적 상호 의존관계를 수반하는 에너지 교류망보다는 생각이 넘나드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훨씬 자유롭기 때문이다. 협력 연구 결과가 누적되다 보면 한·중·일 국가의 국제정치적 사정에 걸맞은 에너지 공급 구조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가 어떤 지정학적 입장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우리 역사는 외부 세력의 영향력에 반사판처럼 작동하는 이야기였다. 대륙이 압력을 가하면 거기에 적응하고, 해양세력이 밀고 들어오면 쉽게 거부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륙 세력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조공국 내지는 종속변인이었던 반면에, 해양세력의 일원을 자처한 최근 70년 동안에는 경제성장과 함께 나름의 정치적 지위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동북아수퍼그리드가 이런 장점을 조금이라도 반감시키는 것은 아닌지 엄정한 진단이 필요하다.

– 김일명

지구와에너지
(사)한반도평화에너지센터가 발행하는 신개념의 컨설팅형 입법정책 계간지 매거진 '지구와에너지' 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