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민주주의란 있는가

고예인 한국스포츠경제 기자. 중앙대 국악과 졸업. 고려대 응용문화콘텐츠학과 석사. 현대 HCN 아나운서 근무.

“민주주의는 국왕이나 귀족들보다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더 높지만, 그 실수를 깨닫고 바른길로 되돌아올 확률도 높다. 왜냐하면 보통 민주 정치 안에서는 최대 다수의 이해 관계와 상충되고 이성에 어긋나는 이해관계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 주의는 경험을 통해서만 바른길로 접어든다.”(알렉시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토크빌이 미국에 출장 가면서 쓴 ‘미국의 민주주의’에는 민주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우수성과 함께 비효율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카리스마적인 리 더나 왕이 지배하는 사회는 의외로 효율성이 높을 수 있다. 그의 현명한 지도 력을 따라가면 공동체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플라톤은 ‘철인 독재론’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합의 시스 템에 의한 공동체다. 독재 체제와 달리 다양한 사람의 의견과 관점을 수렴해 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특징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비효율성이 발생하더라도 감수하는 것도 민주주의만의 특성이다.

그런데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나름대로 학습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단 에 의한 잘못이 저질러질 경우 그 실수를 깨닫고 바른길로 되돌아올 수 있다 고 주장했다. 흔히 말하는 ‘자정 능력’이다. 그런데 이것은 거의 대부분 ‘경험’ 을 통해서 공동체 모두가 잘못된 상태를 경험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 이전에 는 제아무리 통찰이 있는 현자가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확 률이 더 높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의 시각까지 포괄한 의사결정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생태정의’와 ‘환경 민주주의’의 배치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또 다른 단어가 있다. 바로 ‘정 의’(justice)다. 흔히 서구식 ‘정의론’의 대표적인 석학인 존 롤스는 정의 개 념을 분절하면서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와 분배적 정의(distributional justice)를 이야기했다. 하나는 집단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그 과정에서 공정함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집단이 성과를 배분하 면서 타당하게 과실을 나누어 갖는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유교 문화에는 정의 개념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 ‘의’(義)에 는 소위 ‘마땅함’이라는 가치가 배어 있다. 성리학자들은 이 마땅함의 추구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무조건 옳은 방향으로 향하게끔 스 스로를 단련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흔히 말하는 ‘군자’(君子)는 사람 들을 마땅한 길로 이끌고 교화시킬 수 있는 선두 주자다. 군자는 서구 철학에 서 이야기하는 자발적 협력자 내지는 선각자가 아니라 엘리트에 가깝다. 따라서 군자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면, 일반인들은 그것을 따르고 때에 따라서는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복종해야 한다는 나름의 의무가 생긴다.

동양에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설정된 정의 개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 한 형태의 압제적 지배 방식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본의 와세다대 경제학과 교수인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 박사는 한국 사회에 과도한 도 덕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행위이든지 선(善)과 악(惡)으로 나 누는 습관, 바람직한 가치에 대해서는 어떤 폭력이나 압제도 가능하다는 방식 의 일방적 정의감 등이 한국 사회를 경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을 깔고 나온 개념이 바로 ‘생태정의’(ecological justice)다. 원래 이 용어는 기독교 환경 운동가들에게서 맨 처음 나왔다. 성경의 ‘창세 기’(Genesis)에는 신이 첫 피조물인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그 육 축을 인간의 힘으로 다스려라”라고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이 나온다. 생태학 자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그동안 산업 문명이 마음껏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토대로 작용했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이 인간에 게 부여한 일방적인 분배적 정의가 아니라, 자연환경과 어울려 살아가는 ‘생 태 정의’가 대안적인 세계관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생태정의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설정되느냐다. 한국에서는 성리학 적 관념에 의해 생태정의가 특정한 엘리트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상적 표준인 것처럼 치부되고 있다. 특히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환경단 체들이 그 핵심 기반이다.

“물은 생명이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은 자유롭게 교감하는 평등한 존재다”라는 담론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면, 개발을 거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 의 상태야말로 ‘생태정의’인 것처럼 비친다. 그리고 어떤 유위(有爲)의 노력을 가미한 움직임들은 정의가 아니라 일종의 ‘생태 부채’(ecological debt)인 것 처럼 해석된다. 인간이 자연환경에게 끼치는 손해 내지는 자연 생태계로부터 진 빚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상당히 상대주의적이면서도 자연환경 을 배려하는 사고방식인 듯도 하다.

그러나 생태주의자들은 매우 일방적으로 생태 정의 개념을 산업과 도시에 적용하는 것을 매우 즐긴다. 예를 들어 ‘탈핵 운동’만 봐도 많은 부분들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원자력 발전소는 ‘비리집단’ 내지는 ‘카르텔 속에 숨어서 돈을 벌고 있는 환경오염 집단’인 것처럼 이해된다. 전력 회사가 적자를 보더 라도 그것은 요금 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비리에 의해 만들어진 관리 손실인 것처럼 주장이 되곤 한다. 재생에너지 운동은 ‘햇빛발전운동’이자 ‘마 을발전운동’인 반면, 원자력발전이나 석탄발전은 중앙 중심적인 정부가 만들 어낸 매우 전체주의적인 발전(發電) 방식인 것처럼 표현된다. 이렇게 될 때 ‘ 환경 민주주의’는 제대로 통할 수 없다. 환경론자들이 선호하는 ‘생태 민주주 의’, ‘환경 민주주의’는 자신들과 전혀 반대 논리를 구사하는 사람들과 대등한 시선에서 대화하고 타협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환경론자들이 일 방적으로 생태정의를 외치는 상태에서 민주주의는 토크빌이 말한 그대로 “경 험을 통해서만 바른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국면이 된다. 특히 한국처럼 빠 르게 성장하느라 스스로의 발전 과정에 대해 반성적인 사유를 할 기회가 없었 던 국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관료 해체론자’들의 ‘관료 선호’

환경 민주주의는 대통령 중심제와 결합되며 또 다른 제도적 변질을 초래하 기도 한다. 한때 환경운동연합과 녹색연합은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일 시절 지 방자치, 관료제 해체 운동의 또 다른 기층 세력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관료제 가 산업 문명 중심의 정책을 펴는 데 매우 핵심적인 도구라고 주장하고, 거기 에서 권한을 조금씩 시민 사회로 이양할 것을 주장해 왔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각종 지자체의 ‘민관협력 협의체’였다.

그러나 이 협의체들은 항상 그 업무를 보는 상근자들이 아니라 위촉직 전문 가들을 중심으로 꾸려진다. 따라서 업무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는 상당 부분 ‘늘공’(늘 공무원)들에게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가 애드호크라시 조직을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공공과 민간 간의 긴밀한 소통 이 일어난다기보다는 오히려 관료가 환경 전반을 이끌어 가는 국면이 되기 쉽 다. 특히 민간 전문가가 관(官)에 비해 우월한 지식을 갖기 힘든 환경 분야에서 는 위원회 조직을 지원하는 관료 조직의 권능이 더욱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문재인 행정부에서는 청와대 중심의 정책 집행 체계가 선호되면서 사실상 모든 관료들이 대통령 비서실을 쳐다보는 상황이 연출되어 버렸다. 현 재 한국에서 가장 막강한 환경 권력을 갖고 있는 인물은 환경부 장관이 아니 라 대통령 비서실 산하의 기후환경비서관이다. 이 자리는 대통령과 비서실장 의 공식적인 의사결정뿐만 아니라 비답(批答 : 윗사람의 뜻을 긴밀하게 직접 파악해 내는 것)까지 얻어 낼 수 있는 막강한 직위다. 장관은 대통령에게 각 료로서 일일이 공문을 통해 보고해야 하지만 비서들은 쉽게 대통령을 만나 서 부딪히고 업무 조정을 할 수 있는 이점을 갖는다. 이러한 청와대 기후환경 비서관의 위상을 바탕으로 여러 관료들과 위원회 조직들이 세팅되면서 사실 상 ‘환경 민주주의자’들은 ‘신(新) 관료제’를 지향하는 국면을 연출하고 있다.

김은경 환경부 장관이 2018년 초에 만든 ‘중앙환경정책위원회’도 ‘환경 민 주주의자’들에 의한 ‘신 관료제’를 체감하게 하는 조직이다. 이 위원회에는 전 체 126명의 참여 인원 중 약 70여 명이 환경운동연합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 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현장 환경 운동가로서 자신의 분야에서 끊임없이 반(反) 개발 이슈를 생산해 왔던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당 연직으로 파견된 정부 관료들과 매우 긴밀하게 소통하는 ‘위촉직’ 자문 위원 들이기도 하다. 2018년 6월부터 환경부는 수자원공사까지 끌어안으면서 영 향력이 막강한 부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조직의 정책 자문 위원으로 활 동하며 각종 사업들의 계획을 심의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하는 활동가 출신 위 원들은 공무원들과 동형화(同型化)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또 때에 따라서는 공공 조직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을 법 하다.

‘희망제작소 사태’의 함의

환경 이슈는 아니지만 공공 파트와 동형화된 시민운동가들의 사례를 볼 수 있는 이슈가 2018년 국정감사 과정에서 나왔다. ‘중앙일보’는 2018년 10월 보도를 통해 행정안전부가 같은 해 4월 공모하여 시작한 ‘국민 해결 2018’ 과 제를 희망 제작소와 함께 진행하는 과정에서 절차적 부정의가 있었다고 주장 했다. 그 이유는 과제를 심사한 위원들 대부분이 희망제작소 출신이거나 거 기서 강의, 협업 활동 등을 진행한 사람들이었고, 이 사업을 이끌고 있는 현직 과장 2명이 희망제작소와 서울시 사회적 경제 프로그램의 관계자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얼핏 보면 이 사태는 정부 조달 과정에서 벌어진 부적절한 계약 상의 이슈일 수 있지만, 과거 권력을 감시하고 관료제를 비판하는 역할을 했 던 ‘제3세력(시민사회)’이 공공 조직과 결합해 ‘신(新) 관료제’를 만들어 내는 모습으로도 보일 수 있다. 특히 이들은 고시 출신 공무원들과 달리 전문직 임 기제 공무원들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자신들이 활동하던 시민사회에 골 고루,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업을 진행하는 데 골몰할 수 있다. 그리고 언 젠가 자신들이 재야(在野)로 돌아가서 보다 넓어진 반경에서 활동할 수 있도 록 진지를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쉽다.

이처럼 시민사회 운동가가 신 관료화되는 현상이 지금 환경 분야에서도 조 금씩 벌어지고 있다. 그들이 환경부 산하 기관장이나 감사, 이사로 부임하거 나, 위촉직 위원으로 보임되는 과정에서도 ‘관료적 동형화’는 계속해서 진행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 과정을 매우 예리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과연 환경 민주주의가 특정한 집단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 지 객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환경정책 전문가, 마이클 쉘렌버거 ‘탈원전 반대’ 기자회견. 2017. 8

‘다양한 환경단체’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처럼 시민사회단체를 압살하고 환경단체를 마치 진보 좌파의 전형인 것처럼 몰아세우는 방식은 매우 부적절하다. 환경 담론은 우 리 사회가 발전하면서 반성적 운동 개념으로 나온 철학에 기초한다. 따라서 어떤 성장 지향적 담론이 나오더라도 환경 사상과 철학 이상의 위력을 갖기 란 어렵다. 게다가 대중들에게는 ‘공정성 편향’(fairness bias)이라는 것이 있 기 때문에 얼핏 도덕적으로 옳아 보이는 행동이나 콘텐츠에 대해서 막연한 지지를 보낼 가능성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때로는 과격하더라도 표면 적으로는 매우 합리적인 논리를 구사하는 환경단체들의 영향력을 무시해서 도 안 될 것이다.

마이클 쉘렌버거(Michael Schelenberger)라는 인물이 있다. ‘환경 진 보’(environmental progress)라는 미국의 대안 환경단체를 이끄는 그는 과 거 맹렬한 탈핵 운동가였다. ‘스리마일 원전 사고’ 이후 90년대 미국 사회에 서는 웨스팅하우스를 비롯한 원전 설비 업자들이 조금씩 하향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일련의 흐름과 함께 강력한 탈핵주의자들이 여러 주를 다니며 원 전 건설 반대 운동을 벌이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다. 쉘렌버거는 그중 매우 젊 고 영민한 탈핵 운동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쉘렌버거는 자신이 지지하던 탈핵 운동이 사실은 LNG 발 전이나 석유 회사들에 의해 엄청난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쉘렌버거는 원자력 발전소가 각종 폭발 위험 내지는 폐기물 배출 위 험 등을 제외하면 제법 환경에 부담이 덜 가는 발전 방식 중 하나라는 점을 깨 닫게 되었다. 물론 그의 ‘전향’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미국 내 에너 지 시민운동가들 사이에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있다. 어찌 되었든 쉘렌버거 는 무작정 특정 발전 방식을 반대하는 운동의 정당성에 큰 회의를 품고 자신 만의 환경 운동을 시작했다. 다름 아닌 ‘원자력을 긍정하는 환경운동’이었다.

한국에서는 2017년 5월부터 신고리 5,6호기 건설 공론화 과정에서 ‘탈원 전’ 흐름을 우려하던 구 원전 집단에서 쉘렌버거의 ‘환경 진보’ 운동을 매우 긍정적으로 소개하고 자신들의 캐치프레이즈로 삼기 시작했다. 물론 원전 긍 정론자들은 때에 따라서는 재생에너지를 비롯한 ‘친환경 발전 방식’들에 대해 정도 이상의 비판과 감정적 비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 사회의 통념과 다른 ‘원자력을 긍정하는 환경운동가’를 우리에게 소개한 것은 그 나 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무작정 탈(脫) 성장론을 지향하고, 과거의 자연환 경으로 사회를 복원하기를 주장하는 획일주의적인 환경운동을 극복할 수 있 는 초석(礎石)을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성한 환경 단체들이 생겨야만 한 다. 기업들이나 정부 기관이 저지르는 환경 오염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한 자 세를 보이되, 환경 규제가 다양한 지역의 사회문화적 삶에 미칠 영향을 고려 하여 건설적인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야만 한다.

– 고예인

지구와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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