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가 사라진 봄은 결코 봄이 아니다

이만훈 한국학연구소 온누리 대표

심상치 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이만훈의 ‘제비가 알려주는 생태 이야기’

예부터 봄의 완성은 강남제비의 왕림

쏜살같다더니 참 세월 빠르다. 겨울이 하도 추워 영 오지도 않을 것 같던 봄이 어느 결에 살금, 고양이처럼 다가와선 산이야 들이야 온통 꽃으로 울 긋불긋 물들이는가 싶더니 이내 흐드러진 꽃내음 속으로 참새 혓바닥만 한 연록의 푸름을 새순으로 피어 올린다. 곧 짙푸르러지고 그러면 이내 여름이 올 테다. 이 얼마나 장엄한 자연의 조화인가? 그래서 봄은 본디 흥이 겨운 철 이거늘. 날은 따사로이 해사하고, 산과 들은 온갖 꽃들로 넘쳐나니 제 아무 리 목석이라도 절로 신이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한테만은 영 아니 다. 제비가 없기 때문이다.

#원래 봄은 허투루 멋대로 오지 않는다. 따박따박 순서에 따라 박자를 맞 춰가며 우리 곁에 온다. 아직 바람이 쎄 하지만 노루 꼬리만 하던 해 길이 가 들쑥 자라듯 키 재기를 시작하면 어느새 볕이 바른 곳엔 어김없이 조무 래기들이 모여들어 술래잡기, 땅따먹기, 비석치기, 고무줄놀이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중에서도 퍽이나 봄을 재촉하는 건 역시 여자애들의 고무 줄놀이.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나 가세’

한껏 곱은 손으로도 양쪽에서 팽팽히 늘려 잡은 고무줄을 폴짝폴짝 뛰어 걸고, 넘고, 휘감으며 목청껏 외쳐대는, 꼬맹이 누이들의 저 노랫소리에 아 무리 계절의 여왕입네 하는 봄이라도 아니 오고 배기겠나! 하여, 그 노래에 이끌려 산 너머 남촌에서부터 바람이 보드라워지고 영춘화(迎春化)니 보춘 화(報春化)니 갖가지 꽃소식이 전해지며 봄차림이 시작되게 마련인데 그 완 성은 뭐니 뭐니 해도 강남제비의 왕림이었다. 그런데 봄이라고 나라가 온통 꽃놀이네 뭐네 떠들썩한 판에도 제비가 없다니…!

제비의 경쾌한 날갯짓과 지저귐이 봄을 간증하던 시절

#도저히 없던 것이 느닷없이 생겨남에 얻는 기쁨보다는 내내 있던 것이 홀연히 사라져버림에서 몰아쳐오는 허전함이 더 큰 법. 맞다. 적어도 1990 년대 말 그해 봄은 그랬다. 사는 게 무언지 나날이 죽어라 쫓기듯 허덕대다 봄이라고 하길래 문득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보다 그만 부르르 떨고 말았다. 아, 이 몹쓸 놈의 무심함이여! 화란춘성에 만화방창이라 봄은 봄인 듯한데 정작 제비가 없구나!

불과 몇 년 전 박동진 명창이 걸쭉한 탁배기 소리로 “제비 몰러 나간다. 제비 후리러 나가안~다”고 외칠 때까지만 해도 서울 근교 웬만한 곳에선 이 맘때면 늘 제비들의 경쾌한 날갯짓과 지저귐이 봄을 간증하곤 했던 터. 아, <사철가>가 이다지도 절절히 가슴을 저미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더랬다.

‘이산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만은/ 세상사 쓸쓸허더라…’

그 봄 이래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제비 없는 봄을 보내고 있으니 그야말 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하지만 삼십이 넘은 자식들은 애비의 제비타령을 귓전에라도 담기는커 녕 마뜩치 않은 눈치다. 분명 어려서 제비를 건성으로 보기는 하였으되 느 끼지 못한 탓이다.

#얼추 쉰 줄에 든 사람들부터 그 이상 연배들은 까칠한 서울내기들조차 제비에 익숙하다.

하물며 시골에서 나서 제비 똥 맞아가며 커온 나 같은 ‘촌 것’이야 말해 무엇 하랴. 예부터 흔히 소를 ‘생구’라 부르며 식구와 마찬가지 대접을 해 왔 지만 날짐승 가운데선 집에서 기르는 닭보다도 외려 제비가 가족 같았다. 구 월 구일 강남으로 ‘피한(避寒)’ 갔다가 삼월 삼짇날이면 어김없이 돌아오고 야 마는 ‘의리’도 그렇거니와, 제 집을 새로 고쳐 짓고 새끼를 치는 여름 내 내 무시로 처마 밑이나 지붕 용마름 위 아니면 빨랫줄에 앉아 때론 고개를 주억거리며 멀뚱멀뚱 쳐다보기도 하고, 때론 지지배배 뭐라 뭐라 말을 걸어 오는 그 살가움이라니-.

우리 조상들이 제비를 영물이라고 여긴 이유

할머니는 그런 제비를 ‘영물(靈物)’이라 하셨다. 집안 최고 어른이신 할머니의 든든한 ‘빽’을 믿어서일까? 어릴 적 우리 집엔 유난스레 제비 둥지가 많았다. ㅁ자 집인데 대문 위와 사랑방의 밖으로 난 문 위, 대문과 안마당 사이 봉당 위, 분합문이 있는 대청마루 밖 처마 밑, ‘거른방(건넌방)’ 툇마루 위, 부엌 뒷방 입구 문 위, 그리고 분합문 안쪽에 있는 대청 대들보 위 등 무 려 일곱 채나 되었다. 가히 제비호텔이라 할 만 했다. 제비는 한 배에 대개 대여섯 마리의 새끼를 치는데 보름가량의 알 품기를 거쳐 태어난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까지 스물댓 날 동안 이른 아침부터 저녁 해거름까지 집안은 온통 그야말로 제비들의 합창으로 시끄러웠다. 거기에다 이따금 똥이나 먹 이 찌꺼기를 마루나 안마당, 혹은 봉당에 떨어뜨려 더럽히는가 하면 심지어 밥상 위에 실례를 하기도 했지만 그닥 성가시다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우 리 집만 그런 건 아니지만 상전 모시듯 하진 않았어도 갓난애마냥 정성껏 보살폈다. 둥지마다 밑받침을 해주고 수시로 오물을 청소해줬다. 간혹 둥지 밖으로 밀려나온 새끼가 있으면 즉시 안으로 모셨다. 하긴 제비란 놈이 보통 영검스런 게 아니어서 뭔가 그 집안에 께름직한 분위기가 감돌면 귀신같 이 알아채곤 지붕만 빙빙 돌다 다른 곳으로 가버리곤 하니 일부러라도 친하 기 위해선 달리 도리가 없기도 했다. 그 시절엔 제비가 없는 집은 흉가로 여 겨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비가 둥지를 집안 깊숙이 들여 지으면 어김없이 큰물이 나는 걸 여러 차례 목도한 경험에 비춰볼 때 제비의 본능적 ‘예지력 (豫知力)’이 남다른 게 틀림없을 터. 하니, 제비가 깃들지 않는 집이란 분명 불안한 구석이 있을 것이니 곧 흉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해내(海內)의 큰 대문을 본체 만체 다 지내고/ 옛 주인이라 하여 내 집 다시 찾았고나/ 옹색한 처마일망 정 푼푼하게 쓰거라’하고 봄 손님 제비를 영접한 것도 다 이런 까닭에서이 리라.

#제비를 뜻하는 한자인 ‘燕(연)’은 제비의 상형문자로 긴 꽁지가 특징인 새의 모습으로 이미 갑골문에 등장한다. 제비는 동이족과 깊은 관계가 있 다. 태평성대이던 요임금 때 간적(簡狄)이란 여성이 냇가에서 목욕을 하다 제비가 물고 온 구슬을 삼키고 설(契)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바 로 동이족 나라인 상(商)의 건국자 탕(湯)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동 이족은 ‘제비족’인 셈이다. 가뜩이나 살림살이도 한 지붕 밑에서 하는 데다 족보(?)도 이러저러 하니 제비는 오래전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고, 이래저래 길조(吉鳥)일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三足烏)는 태양 의 후예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상나라의 현조(玄鳥·제비)와 통하고, 신라 경 덕왕 때 만들어 당나라에 보낸 만불산(萬佛山)에 제비가 새겨진 것도 상서 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경남 양산 통도사 명부전 포벽에도 꽃과 제비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극락세계의 평화로움을 상징하고 있다.

#제비는 사람과 함께 동거하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새끼 치며 보내는 ‘한 여름 삶’이 우리네 주식인 쌀을 빚어내는 벼농사를 빼닮아 더욱 맘이 가고 이물 없는 사이일 수밖에 없다.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면 이 땅의 농부들은 부랴부랴 볍 씨를 쳐서 한켠에 못자리를 만들고 두엄을 편 논을 간 뒤 그 위에 물을 잡 아 써레질을 한다. 어린 모가 자라는 동안 제비도 논에서 흙을 물어다 둥지 를 짓고 알을 품는다. 알을 깨고 새끼가 태어나는 건 못자리에서 제 논바닥 으로 모를 옮겨 심는 모내기에 다름 아니다. 새끼를 키우는 동안 벼가 자라 는 논 벌판 위로 뻔질나게 드나드는 그 모습이란 농부에 부니는 다정(多情) 이고, 그네의 날갯짓을 보고 쑥쑥 자라는 게 벼임에랴. 한여름 뙤약볕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키운 새끼들을 추슬러 떠날 채비를 할 때쯤이면 제비의 구 슬땀을 받아먹은 벼들도 탱글탱글 영글어 고개를 숙이니 이 아니 풍년이랴.

제비는 농부뿐만 아니라 사대부들과도 친했다

#제비와 친한 건 농부만 아니라 멀쩡한 양반 사대부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껏 격식을 따지고 젠체하는 그들이었지만 제비가 논어를 읽는 새라며 군 자 대접을 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실학자 박지 원은 호가 연암(燕巖), 즉 ‘제비바위’다. 세도정치의 바람을 피해 황해도 금 천의 제비골에 은거하면서 쓰기 시작한 것인데 그만큼 제비를 스스럼없게 여겼다.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고지고 하던 어느 봄날 연암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혼자 양손으로 편을 삼아 쌍륙(雙六)을 놀고 있었는데 문득 발 너 머로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제비가 자신을 나 무라는 듯이 “회여지지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 논어>「위정」에 나오는 내용으로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에게 “너에게 안다 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誨汝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제비의 “지지배배 지지배배” 하는 소리에 대한 의인해 학이다. 이에 연암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너는 글 읽기를 좋아하는 구나. 하지만 바둑, 장기와 같은 놀이도 있지 않느냐. 이것이라도 하는 편 이 낫단다”라고 대꾸했다. 그 역시 <논어>「양화(陽貨)」에 나오는 공자님 말 씀을 인용한 것이다.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아무 마음도 쓰지 않고 지낸다면 곤란하다. 바둑 과 장기가 있지 않은가. 이것이라도 하는 편이 그나마 낫다(飽食終日 無所用 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연암은 이 같은 내용을 족질한테 보내는 편지에 담아 근황을 전했다.

또 어떤 이는 제비가 이른바 ‘시시비비가(是是非非歌)’도 읊는다고 뻥을 친다.

‘시시비비비시시(是是非非非是是·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 꼭 옳진 않고)/ 시비비시비비시(是非非是非非是 · 그른 것 옳다 하고 옳 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시비비시시비비(是非非是是非非 ·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시시비 비시시비(是是非非是是非 ·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이 정도면 제비의 학문도 그렇고, 그것을 알아보는 선비의 격의 없는 아 량과 인품 역시 하늘 아래 으뜸 아닌가.

#제비는 워낙 곰살맞아 사람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이다 보니 각종 설화와 민담, 문학, 음악, 미술, 공예 등에 곧잘 등장한다. ‘흥보가’에서처럼 은혜를 알고 의리를 지키는 권선징악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일제강점기 때 는 나라를 되찾는 ‘봄’을 불러오는 희망이자 메신저로 많은 시인의 부름을 받는 존재이기도 했다. 제비는 암수가 짝을 이뤄 부부가 되면 몇 해고 함께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진 터라 원앙새, 두루미 등과 같이 부부 금슬이나 남 녀 간 애정을 표현하는 데 종종 동원된다. “이 몸이 시어져서 강계갑산 제 비 되어/ 임 자는 창 추녀 끝마다 종종 자로 집을 지어 두고/ 그 집에 드는 체 하고 임의 방에 들리라.”

이 시조에서처럼 제비는 늘 사람 가까운 곳에서 애정이 돈독하게 보이므 로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제비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또 백성의 삶과 가깝다 보니 제비의 생태를 통해 민초들의 애환이 그려 지기도 한다.

‘제비 한 마리 처음 날아와 지지배배 그 소리 그치지 않네/ 말하는 뜻 분 명히 알 수 없지만 집 없는 서러움을 호소하는 듯/느릅나무 홰나무 묵어 구 멍 많은데 어찌하여 그 곳에 깃들지 않을까?/ 제비 다시 지저귀며 사람에 게 말하는 듯/느릅나무 구멍은 황새가 쪼고 홰나무 구멍은 뱀이 와서 뒤진 다오.(鷰子初來時/ 喃喃語不休/ 語意雖未明/ 似訴無家愁/ 楡槐老多穴/ 何不此淹留/ 燕子復喃喃/ 似與人語酬/ 楡穴鸛來啄/ 槐穴蛇來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이 한시에서 제비의 생태를 통 해 집 없는 서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1902~1934)의 ‘제비’도 비슷한 정조를 보인다.

‘하눌로 나라다니는 제비의몸으로도/ 一定한깃을 두고 도라오거든!/ 엇 지설지안으랴, 집도 업는 몸이야!’

3월 3일 삼짇날에 와서 9월 9일 중앙절에 떠나는 새

# 제비는 음력 3월 3일 삼짇날에 와서 9월 9일 중양절에 강남으로 간 다. 양수가 겹치는 날에 갔다가 양수가 겹치는 날에 돌아오는 새이므로 길 조라고 여긴다. 예부터 그래서 집에 제비가 날아들어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 은 좋은 징조라고 믿었다. 제비는 해충을 먹이로 하기 때문에 민가에 들어 와 집 짓는 것을 말리지 않고 제비가 새끼를 많이 치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 다. 제비는 감각적이고 신경이 예민하고 총명한 영물로 인식되었다. 또 제 비는 천녀(天女)와 귀녀(貴女)를 상징하고, 비를 오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며 부귀(富貴) 또는 장수(長壽)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삼짇날 마 을에서 제비를 제일 먼저 보면 1년 내내 재수가 좋고 몸이 아주 가벼워 날 쌔게 생활한다고 믿었다. 또 제비가 올 때 높이 날면 날씨가 쾌청하고 낮 게 날면 비가 내리며, 계속 지저귀며 낮게 날아다니면 태풍이나 장마를 예 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먹이인 모기, 하루살이 등이 습기가 많아 지면 날개가 무거워져 낮게 날기 때문에 이를 잡기 위해 제비들도 낮게 나 는 것이라고 한다.

#제비는 5월쯤 알을 낳아 부화되면 하루살이, 모기, 잠자리 등을 잡아 새 끼를 키우는데 20~24일 지나면 새끼 제비들은 둥지를 떠나 인근 풀숲에서 지내고 부모 제비들은 두 번째 번식을 한다. 보통 한 배에 4~6마리를 길러 내니 한해에 새로 늘어나는 식구가 줄잡아 열 마리는 너끈하다. 새끼 한 마 리가 하루 백 번 정도 먹이를 먹으니 부모 제비는 적어도 각각 200번씩 모 이를 물어 나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심할 경우 하루 900번도 들락날 락 한다니 자식 사랑에 관한 한 언급을 흐지부지해야 할 판이다. 제비는 웬 만한 비바람 속에서도 새끼를 먹이기 위해 사냥을 하는데 그야말로 ‘빗 사 이로 막 가’가 따로 없다. 평균 속도 50㎞/h(*최대속력 250㎞/h)로 빨리 날 면서도 공중에서 급선회를 자유자재로 하며 먼지만 한 하루살이를 낚아채 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빙빙 가로 세로 솟치고 내닫고.’ 이 같은 빠 른 곡예비행이 가능한 것은 V자 모양의 긴 꼬리깃 덕분인데 날렵함의 상징 으로 이를 본 딴 것이 다름 아닌 ‘연미복(燕尾服·영어로도 같은 뜻인 swallow-tailed coat)’이다. 제비 한 마리가 연간 잡아먹는 해충 수가 무려 5만 여 마리나 된다니 이보다 좋은 해충 방제가 또 있을까?

제비 한 마리가 지니는 생태적 값어치는?

#흰눈썹울새란 놈이 있다. 참새와 비슷하게 생긴 나그네새인데 독일의 유명한 환경생태학자 프레데릭 베스터(F. Vester) 박사는 이 놈 한 마리가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가치를 따져 마리당 무려 180만원(1357유로)의 값어 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뼈와 고기 값은 고작 480원밖에 안 되지만 사람들이 보고, 소리를 들으면 서 즐거움을 얻는데, 이 같은 정서적 가치를 1년 치 신경안정제 값으로 환산 해 보니 4만원 정도 된다는 것이다. 또 한 마리가 1년에 10만 마리의 해충 을 잡아먹는데 이 중 약 6만 마리는 사람이 방제해야 할 몫으로 계산하면 해 충 구제 비용이 6만원 정도다. 또 씨앗 살포자로 새 한 마리가 1년에 한 그루 의 나무를 퍼뜨린다면 사람이 나무를 심는 데 드는 인건비를 계산해 보니 8 만원, 환경감시자, 공생파트너, 기술 개발과 생물 다양성에 대한 기여 등 의 값을 모두 합한 금액이 40만원 정도 된다. 그리고 참새의 수명을 5년으로 봤을 때 참새의 몸값은 약 180만원(고기와 뼈 값은 5년 곱한 값에서 제 외)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비도 어림잡아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런데 제비는 이미 1999년 서울시보호종(*국제자연보전연맹 관심필요종)으로 지정되는 등 우 리 주변에서 보기 힘든 새가 되고 말았으니…. 제비 수가 줄면 천적인 해충 이 크게 늘어나기 마련이고, 이 해충을 없애려면 더 많은 살충제를 쓸 수 밖에 없을 것이요, 그 결과 제비는 더 줄어들고, 인간은 살충제에 찌들고-.

지구는 지금 6번째 대멸종의 시대…멸종이 멸종을 낳는다

#과학자들은 현재 지구에서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 속 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 종이 멸종하면 생태계의 불안 정을 초래해 다른 종들의 멸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결국 인류의 행복 은 물론 나아가 생존마저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는 얘기다. 미국 스탠포드대 학 폴 에를리히 교수는 “다른 종들을 멸종시키는 것은 인류가 자기들이 앉 아 있는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라내고 자신의 생명 유지 장치를 망가뜨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멸종이 멸종을 낳는다! 지금 세계를 덮치고 있는 역질 ‘코로나19’도 생태계 교란에서 온 것일지 모른다. 소름이 끼친다. 제비 없는 봄이 결코 봄이 아닌 까닭이다.

– 이만훈

지구와에너지
(사)한반도평화에너지센터가 발행하는 신개념의 컨설팅형 입법정책 계간지 매거진 '지구와에너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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